'최초·최고' 자랑해도 현실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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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최고' 자랑해도 현실은 부끄럽다
  • 김주희
  • 승인 2011.02.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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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개항장 밖으로 눈을 돌리자 (1)잊혀지는 역사
취재: 김주희 기자

 


국내 첫 성냥 공장 터에는 지금 사우나 등이 들어선 높은 빌딩이 서 있다.
이 건물 주변 어디에도 이 자리가 성냥공장 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나 조형물을 발견할 수 없다. 

1883년 개항으로 인천은 근대 문물이 조선에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 떠올랐다.

이런 까닭에 인천은 사이다와 성냥, 야구와 축구, 자장면과 커피에 이르기까지, '최초 · 최고'란 수식어를 단, 근대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한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인천시가 '인천'을 홍보할 때 늘 강조하는 근대문화유산은 개항기 외국인들이 살던 조계지인 중구 북성동과 신포동 일대는 물론, 그 주변에 조선인 마을이 있던 중·동구 등지에 넓게 퍼져 있다.

그런데 시가 문화지구로까지 지정하려는 개항장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남고 전해오는 근대문화유산를 관리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근대문화재는 방치된 지 오래고, 전해온 이야기를 확인할 자료도 부실하다. 안내판은 고사하고 '최초'라고 하는 곳의 정확한 위치조차 가물가물하다.

<인천in>은 앞으로 3회에 걸쳐 근대문화유산의 현 실태와 이를 지켜온 시민(단체)의 노력을 살피고, 앞으로 근대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가꿀지 생각하는 기획을 진행한다.

(1) 잊혀지는 역사

최근 인천시가 중구 신포동과 북성동 일대, 일명 '개항장'을 문화지구로 지정해 관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개항장을 문화지구로 지정하는 것은 서울 대학로와 인사동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다.

시는 개항장을 문화지구로 지정해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창조공간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구상이다.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 유치 기대가 크다.

개항장은 1883년 외국에 문을 연 이래 근현대사의 영광과 아픔이 서린 곳이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근대문화재도 제법 있다.

이 때문에 시의 사업 발표 훨씬 이전부터 개항장을 지키고 가꾸려는 시민(단체)의 노력이 있어 왔다. 자발적으로 답사팀까지 꾸려 개항장의 문화와 역사를 찾고 이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대구 등 다른 도시가 이를 배워갈 정도였다.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개항장이 알려지고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지자체가 예산을 투입했다. 답사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고, 옛 건물을 활용해 박물관도 세웠다. 안내판을 정비하고 이정표를 세우는 등 주변 거리도 새롭게 단장했다.

 

 


송현교라고 쓴 교각이 화평사거리 한 통신회사 가게 앞 인도에 방치돼 있다.
이 교각 너머 차량 사이로 다른 교각이 보인다. 한 쌍으로 됐지만 제자리를 잃고 엉뚱한 자리에 있고,
페인트 칠이 돼 있거나 쓰레기가 쌓이기도 한다고 주변 주민들은 말한다

그동안 중구 개항장 일대에서 근대문화유산 답사 활동을 해 온 해반문화사랑회는 지난해 하반기 배다리에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을 잇는 골목길 답사 활동을 폈다. 힘에 의해 개항장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해반문화사랑회 관계자는 "조계지를 중심으로 한 개항장은 일본인과 중국인, 서양사람 등 외국인이 살던 곳이었다. 개항장에 집중하던 동안 우리 전 세대가 살던 곳은 개항장 밖 세상을 잊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다.

골목길 답사는 미리 신청하면 조선인 거주 지역에 대한 역사와 문화유산 등에 대해 교육 받은 골목길 해설사가 동행한다.

수도국산에서 배다리 일대를 돌아보는 코스에는 국내 첫 성냥공장터와 공·사립 통틀어 첫 서구식 초등학교인 영화학당이 있다. 인천의 첫 공립학교인 창영초등학교는 인천지역 3·1운동의 발상지다. 송현교가 있던 수문통 주변은 일제강점기 고달팠던 조선인의 애환이 서린 곳이고, 일명 '양키시장' 또한 전후 세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눈을 더 돌리면 일제강점기 전염병 연구소에 자리한 동명학교의 이야기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잘 가꾸고 보전하려는 자치단체의 노력과 흔적은 찾기 힘들다.

답사를 맡았던 한 골목길문화해설사는 "송현교의 교각은 제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방치된 채 훼손돼 있고, 높은 빌딩이 들어선 성냥공장 터에는 안내문조차 없다. 조선인 거주 지역을 공부할 수 있는 역사 자료도 부족했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새롭게 조성한 곳이 현 신흥동과 신생동, 율목동 등지로 일본의 경제·문화 침탈 흔적이 남아 있다.

국내 최초의 탄산수(사이다) 공장이 신흥동에 들어섰고, 현 시립도원실내수영장 자리에 평양에 이어 국내 두 번째 소주 양조장이 세워졌다.


1919년 현 시립도원실내수영장에서 문을 연 조일양조장이 후에 이전한 공장이다.
선화동 일대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노랫말에까지 등장하는 신흥동의 사이다 공장 터는 주변부만 알려졌을 뿐 인천시립박물관도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지 못했다. 인터넷에는 엉뚱하게도 '해광사' 자리를 사이다 공장터로 설명하는 사진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근대건축물을 조사하는 재능대 손장원 교수는 "소주 생산 공장으로는 남한에서는 첫 번째인 조일양조장 건물이 선화동 8번지에 남아 있다"면서 "해당 지역이 재개발 지역이라 헐릴 위기에 놓여 있다"라고 말했다.

옛 조일양조장 건물은 홍모씨 소유의 개인 건축물로 지역 주민들은 창고로 쓰이다 오래 전 빈집이 됐다고 말한다.

손 교수는 "조일양조장은 1919년 도원실내수영장터에서 시작해 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이전했고, 현 건축물은 1930년대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는 (해당 건축물이) 보존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조일양조장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이을 필요는 있다"라고 말했다.

신흥동 일대에는 일본 신사와 절이 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현 인천여상은 일본인들이 동공원이라 불렀던 곳인데, 여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지금도 인천여상 운동장 한 편 쉼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주변 어디에도 신사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송도중학교 뒤편 담벼락과 마주한 주태가 골목에도 일본 절이 있었던 흔적이 있지만, 어떤 설명도 돼 있지 않았다.


인천여상 내에 일본 신사 유적이 있지만 이곳 또한 알리는 안내판이 없었다.

일본 신사와 절은 이 일대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종교 활동을 위해 들어선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의 문화와 종교를 말살하려던 의도가 숨어 있다.

이런 현상은 유흥가에도 남았다. 일본은 '유곽'이라는 공창(公娼) 제도를 운영했는데, 일제는 인천의 한 복판에 이 유곽을 두었다.

우현로 62번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 경동 신신예식장에서 용동으로 내려서는, 삼단으로 된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석 두개에 '龍洞券番'(용동권번)이라고 음각된 글자가 아직도 선명하다.

지역 언론과 인천을 소개하는 책자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지만 정작 이를 찾으려면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없어 애를 먹는다.

지역 인사들은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기에 사실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하물며 뼈아픈 침탈의 역사를 보존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경우는 없다"라고 지적한다.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근대문화재는 알렌별장터에 자리한 숭의동 전도관 등이 또 있다.

각종 개발에 따라 이미 사라진 것도 다수다. 개건너와 인천을 이어주던 '번지기 나루터'나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 생산지였던 주안염전은 구전(口傳)된 지 오래다. 일제강점기 만석동과 부평의 무기생산공장 또한 책 속에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근대문화유산뿐 아니다.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문학·부평도호부는 사람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어 훼손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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