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일구는 마음을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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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일구는 마음을 사랑하면서
  • 최종규
  • 승인 2011.03.08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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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로라 잉걸스 와일더, 《초원의 집(1)》

- 책이름 : 초원의 집 (1)
- 글 : 로라 잉걸스 와일더
- 그림 : 가스 윌리엄즈
- 옮긴이 : 김석희
- 펴낸곳 : 비룡소 (2005.9.25.)
- 책값 : 9000원

 (1) 봄맞이

 시골집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밤과 낮으로 오줌그릇을 비울 때에 감나무 밑으로 갑니다. 작은 텃밭을 일굴 때에 쓰려고 모은 거름통 셋이 꽉꽉 들어차기도 했고, 아이가 눈 똥과 오줌을 잘 모아서 감나무한테 줍니다. 예부터 감나무 둘레에는 개를 묶어, 개가 누는 똥과 오줌이 고스란히 거름이 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감나무는 우리 집 아이 똥오줌을 좋은 밥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겠지요.

 골목집에서 살았더라도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 똥오줌은 거름으로 쓰일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똥이며 오줌이며 그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로 다루고 쓰레기로 버려지며 쓰레기로 여깁니다.

 집에서 먹고 남은 찌꺼기라든지 밥집에서 남기는 찌꺼기 또한 도시에서는 고스란히 쓰레기입니다. 그나마 개라도 키운다면 개밥으로 삼을 만하지만, 도시에서 개밥을 ‘사람이 먹고 남은 밥’으로 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사료를 줍니다. 더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이들 개와 고양이가 누는 똥오줌은 사람이 누는 똥오줌과 마찬가지로 그예 쓰레기일 뿐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틈이 없습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흙에서 얻는데, 막상 우리들 사람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흙한테서 얻기만 하지, 흙한테 무엇 하나 제대로 살가이 돌려주는 일이란 없습니다. 아니,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 먹을거리를 흙한테서 고맙게 얻는 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생각하도록 이끄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생각해 보았자 어찌저찌 삶을 바꾸지 않습니다.

.. 아빠 혼자 눈 덮인 숲에서 추위를 견디며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냥감을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겨울이 오기 전에 되도록 많은 식량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아빠는 사슴 가죽을 조심스럽게 벗긴 다음, 가죽에 소금을 뿌려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래야 가죽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그 일이 끝나면, 고기를 잘게 토막내어 널빤지 위에 펼쳐놓고 소금을 뿌렸다 … 냄새가 고소했다. 부엌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 벽난로에서 새빨간 불꽃을 내며 타고 있는 히코리나무 냄새, 그리고 탁자 위에 할머니의 반짇고리와 나란히 놓여 있는 정향나무 열매 냄새로 집안이 온통 향기로웠다 ..  (11, 128쪽)

 봄이 가까이 다가온 멧골자락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파랗습니다. 춥디춥던 겨울날에는 이 파란하늘이 손·귀·코·발 모두 시리도록 하는 파랑이었습니다. 차츰 날이 풀리는 요즈음에는 이 파란하늘이 살랑살랑 보드라운 바람을 싣는 파랑입니다. 아직 눈이 남은 데가 많으나, 이 눈이랑 얼음도 한두 달 사이에 모조리 녹거나 마르겠지요. 언제 눈이 있었느냐는 듯이 온 들판과 멧자락에는 푸른 새싹이 가득할 테지요. 아이 손을 붙잡고 멧길을 오르내리면서 봄풀과 봄나물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 옷차림이나 가게에서 내놓는 물건에서 떠올리는 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살림집 곁에서 늘 바라보거나 마주하는 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봄은 날씨로 찾아옵니다. 따순 날씨가 봄입니다. 봄은 달력 숫자나 백화점 ‘봄맞이 에누리’가 아닙니다. 보드라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씨가 봄입니다.

 봄은 내 살결로 느낄 때에 봄입니다. 겨우내 입던 두툼한 옷을 한 벌씩 벗을 때에 바야흐로 봄입니다. 봄은 내 발바닥으로 느껴야 봄입니다. 집에서 맨발로 돌아다녀도 발이 시리지 않는구나 하고 느낄 때에 봄입니다. 봄은 내 손으로 느껴야 봄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에 손이 차갑거나 시리기만 하지 않고, 조금씩 시원하다고 느낀다면 비로소 봄입니다.

 봄이기에 봄꽃을 봅니다. 봄이라서 봄나들이 즐깁니다. 봄일 때에 봄옷을 입고, 봄인 만큼 드디어 두꺼운 이불을 북북 비비거나 꾹꾹 밟아 빨면서 길다란 빨랫줄에 바지랑대 걸쳐 널면서 봄햇살로 보송보송 말립니다.

.. 황량한 숲과 쌓인 눈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 오로지 그 작은 통나무집만 따뜻하고 아늑하고 편안했다 … 이제 같이 놀 사촌들이 온 것이다! … “좋은 생각이 있는데, 우리 밖에 나가서 사진을 찍자.” 그러나 엄마는 로라가 밖에서 놀기에는 너무 춥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라가 실망하는 것을 보고는, 잠깐이라면 밖에 나가서 놀아도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로라에게 외투를 입히고, 벙어리장갑을 끼우고, 모자 달린 케이프를 두르고, 목에는 다시 머풀러를 두른 뒤에야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로라는 무척 즐거웠다. 그렇게 신나게 논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오후 내내 로라는 앨리스와 엘라와 피터와 메리와 함께 눈밭에서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사진은 이런 식으로 찍었다. 아이들은 각자 나무 그루터기 위로 올라간 다음, 다 함께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루터기에서 푹신하게 쌓인 눈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얼굴이 눈 속에 파묻히도록 곧장 엎어졌다. 그런 다음, 떨어질 때 생긴 자국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일어났다. 그러면 눈밭에는 다섯 개의 구덩이가 생겼다. 그 구덩이들은 머리며 팔이며 다리며 그밖의 모든 것이 네 소녀와 한 소년의 모양과 거의 똑같았다 ..  (39, 64∼65쪽)

 그래도 봄빨래는 찬물로 하기 어렵습니다. 이월을 지나 삼월과 사월을 맞이하더라도 시골물로는 손이 꽁꽁 얼어붙습니다. 도시처럼 물관을 흐르는 물이 아니라 땅밑에서 흐르는 물은 여름에도 손이 시리도록 차가우니까, 늦겨울이나 이른봄에는 뜨뜻하게 덥혀서 빨래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시골이든 도시이든 어디에서나 빨래기계를 씁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늘 똑같다 싶은 빨래입니다. 빨래를 한대서 철을 느낄 수 없겠지요.

 햇살이 따스합니다. 낮에 집안 문을 다 열어 햇살이 들어오도록 하는데 방온도가 15도입니다. 이부자리를 걷어 마당에 넙니다. 겨울볕이 제법 길게 이어집니다. 빨래를 마칠 때까지 해가 기울지 않습니다. 새로 한 빨래를 널고 다 마른 빨래를 갤 때까지 햇살이 남습니다. 언제 추위가 그토록 길었던가를 떠올리기 힘들 만한 날씨입니다. 추운 날을 지냈으니 따순 날을 맞이하는 셈이라지만 해마다 새봄을 앞두면 몹시 새삼스럽습니다. 추위에 얼어죽으란 법이 없구나 하고 느낍니다. 올해에도 어찌저찌 살아남았네 하고 느낍니다. 이제는 조금 기지개를 켤 만한가 돌아봅니다. 다시금 따사로운 이 날씨에 내 마음이 얼마나 따사로운가 헤아립니다.

.. “난 싫어! 일요일이 싫어!” 그러자 아빠가 책을 내려놓고 엄격하게 말했다. “로라, 이리 와.” 로라는 자기가 볼기 맞을 짓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질질 끌면서 아빠에게 갔다. 그러나 아빠는 안쓰러운 눈길로 잠시 로라를 바라보다가, 번쩍 들어서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로라를 안지 않은 팔을 메리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 주마.” … 예쁜 조약돌을 발견하면 로라는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예쁜 조약돌이 너무 많았고, 새로 발견한 조약돌은 아까 주운 것보다 더 예뻤기 때문에, 로라의 호주머니는 금세 조약돌로 가득 찼다 ..  (84, 162쪽)

 사람은 목숨입니다. 목숨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날과 날씨를 느낄 수 있는 데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날과 날씨를 느끼지 못하거나 느낄 수 없는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 될 때에는 마음이 메마르거나 차가워지고 맙니다.

 공무원을 깎아내리려 한다기보다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가엾다고 느껴서 하는 말인데, 날과 날씨하고는 아랑곳하지 않는 시멘트집에 갇힌 채 지내는 사람들은 갇힌 마음과 갇힌 말입니다. 이는 공무원만이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도 매한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환한 낮에도 불을 켠 곳에서 가르치거나 배웁니다. 은행 일꾼이든 공무원이든 출판사 일꾼이든, 하나같이 한낮에도 불을 환히 밝힌 데에서 일을 합니다. 낮에는 낮이기에 햇볕과 햇빛과 햇살을 머금으면서 일할 수 있어야 내 사람됨과 목숨됨을 느낄 텐데요. 내 사람됨과 목숨됨을 느끼지 못하면서 어떻게 내 이웃과 동무가 나와 똑같은 사람됨과 목숨됨이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나요.

 봄부터 가을까지는 해랑 마주하면서 흙빛을 닮을 사람입니다. 내 살빛이 흙빛을 닮으면서 내 마음 또한 흙을 닮을 사람입니다.

 시멘트나 쇠붙이는 봄이든 겨울이든 똑같습니다. 다를 바 없습니다. 흙은 봄과 겨울이 다르고, 여름과 가을 또한 다릅니다. 흙은 죽은 물건이 아닌 산 목숨입니다. 산 목숨이 숱하게 오글거리는 목숨덩어리입니다. 사람은 죽은 세포 아닌 산 세포가 수없이 모여 이루어진 목숨붙이입니다. 추위를 이기며 한결 튼튼해질 목숨밭입니다.

 (2) 사람맞이

 서울마실이나 인천마실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힘들기 돌아다니니 몸이 힘들 테지만, 복닥이거나 부대껴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함께 지칩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름다운 목숨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둘레에 복닥이거나 부대끼는 사람들 누구나 아름다운 넋이며 숨결이지만, 내 한몸 살아남도록 용을 써야 하다 보니까 자꾸 거칠어지거나 메말라지고 맙니다.

 생각할 일입니다. 생각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은 더더욱 생각할 일입니다. 내가 낳아 키우는 아이를 발로 차거나 가방으로 쳐서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아이를 깔아뭉갠다든지, 아이가 앉는 조그마한 걸상에 어른이 함께 앉는다며 엉덩이를 디밀어 밀어젖힐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보는 앞에서 침을 퉤 뱉거나 거친 말을 거리끼지 않고 내뱉을 수 있나요. 아이가 듣는 자리에서 돈이 어떻고 정치나 사회가 어떻고 하면서 시끄러이 떠들 만한지요.

 저부터 그닥 잘 하는 어버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저부터 우리 아이하고 한결 사랑스러우면서 살가운 나날을 일구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시골집에서 호젓하면서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합니다. 새벽 네 시 반 즈음부터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 대여섯 시 무렵이면 들리는 멧새들 날갯짓 소리와 지저귐 소리를 듣는 보금자리를 좋아합니다. 겨우내 물이 얼어 밥하고 설거지할 물을 날마다 길어 날라야 하니 버겁지만, 이럭저럭 한겨울 보냈습니다. 이제는 날이 폭하니까 우리 집 물도 녹아 주었으면 하지만, 삼월이나 되어야 물이 녹을는지 알쏭달쏭합니다. 그래도 길어 나른 물로 아이 손발과 낯과 똥꼬를 씻기고 이를 닦입니다. 길어 나른 물로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밥을 짓습니다.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합니다. 설거지도 하고 행주도 빱니다.

 날마다 일거리 그득그득하니까 쉴 겨를이라든지 느긋하게 책장 넘길 틈이 없습니다. 일거리가 아니더라도 신나게 뛰놀고픈 아이를 바라볼 때면 아버지 하고픈 대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이는 제 아버지 책을 가로채서 억지로 덮으며 함께 놀자고 잡아끌 줄을 압니다.

.. 로라는 아빠가 하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 잠시 후 로라는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돼지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도축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볼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아서 아주 바쁜 날이었다 … 로라는 메리보다 어렸기 때문에 먼저 목욕을 했다. 토요일 밤에는 샬럿과 함께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로라고 목욕을 끝내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아빠가 목욕통의 물을 비우고 다시 깨끗한 눈을 채워서 메리의 목욕물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메리가 목욕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다음에는 엄마가 담요 칸막이 뒤에서 목욕을 했고, 그 다음에는 아빠가 목욕을 했다. 일요일을 위해 모두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다 ..  (11, 17, 82쪽)

 이제 첫째는 제법 자란 만큼 아이한테 손이 가는 일이 퍽 줄어듭니다. 아이한테 손이 가는 일이 줄었다 해서 한갓지다는 소리가 아니라, 조금은 숨돌릴 겨를이 있다뿐입니다. 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밤에 오줌기저귀를 갈며 생각합니다. 곧 둘째를 낳아 네 식구 북적거리는 살림집이 된다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보낼 나날이 되겠지요. 네 식구 먹을 밥상을 날마다 차리는 일이란 어떠할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네 식구 입을 옷가지를 건사하는 일이란 어떠할까 하고 가누어 봅니다. 네 식구가 함께 마실을 갈 때에는 짐을 얼마나 꾸려야 하나 곱씹어 봅니다.

 고작 두 아이라 하지만, 바로 두 아이인 터라 마실하는 짐은 어른이 져야 합니다.두 아이랑 다녀야 한다면 두 아이가 내놓을 옷 빨래를 살펴야 합니다. 먼 옛날에는 마실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니까 짐 꾸리는 걱정은 거의 안 했을 텐데, 오늘날에는 마실 다니는 사람이 많으니까, 짐 꾸릴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서 그예 자가용을 장만하고 말겠구나 싶습니다.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놀며 집에서 어울리는 삶이라면 바쁘기는 된통 바쁘지만 짐 꾸리거나 아이 데리고 다니는 걱정이 없습니다. 밖에서 일하고 밖에서 놀며 밖에서 어울리다가 잠만 집에서 자는 삶일 때에는, 똑같이 바쁘지만 여기에 짐 꾸리거나 아이 데리고 다니는 근심까지 져야 합니다.

 유치원이나 유아원이나 어린이집 시설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애 아빠나 애 엄마는 자가용을 몰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어느 어버이가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어린이집을 드나드나요. 자전거로 저잣거리를 다니거나 어린이집을 오가는 한국 어버이는 몇 사람쯤 될까요.

 도시라는 곳은 시설이나 문화나 환경이나 교육이나 제도가 잘 갖추어졌다고들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시골에서는 도서관이나 책방 하나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도서관이나 책방이 있더라도 버스 타고 나가기란 힘들고, 차편도 적으며, 품과 겨를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시설이나 문화나 환경이나 교육이나 제도를 누리자면 어찌해야 할까요. 시설이나 문화를 누린다지만, 시설이나 문화를 누리는 만큼 무엇을 잃거나 잊는지를 느낄 수 있는가요. 손꼽히는 대학교에 보내기 좋은 학군이라 하지만,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아이들을 손꼽히는 대학교에 보내려는 어버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요.

.. 엄마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로라와 메리는 엄마를 이것저것 거들었다 … 설거지를 끝낸 다음에는 바퀴 달린 침대를 바람에 쐬었다. 그 일이 끝나면, 로라와 메리는 침대 양 옆에 서서 이불을 반듯하게 펴고 침대 발치와 양 옆으로 이불자락을 쑤셔넣고, 베개를 두드려서 제자리에 놓았다. 그러고 나면 엄마가 바퀴 달린 침대를 큰 침대 밑으로 밀어넣었다. 이 일이 끝나면 엄마는 그날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날마다 그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엄마가 빵을 만드는 토요일이면, 로라와 메리는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한 개씩 받아서 작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  (20, 30, 35쪽)

 즐겁게 받은 고운 목숨 하나입니다. 내 목숨 하나 고마우면서 즐겁고, 네 목숨 하나 고마우면서 즐겁습니다. 서로서로 이 땅에서 즐겁게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다 함께 이 누리에서 고마이 사귀며 만나야 합니다.

 ‘목적’을 세워서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업적’을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실적’에 따라 걷는 길이나 꿈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려고 씨를 내거나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으려고 잎을 틔우거나 가지를 뻗지 않습니다. 목숨이란 공식이나 방정식이 아닙니다. 목숨이란 삶이면서 죽음입니다. 고맙게 살다가 고맙게 죽는 목숨입니다. 고맙게 살다가 고맙게 죽는 목숨이기에 즐거이 살면서 즐거이 죽음길을 걷습니다.

.. “그때는 여자애들도 그만큼 착하게 굴어야 했나요?” 로라가 묻자, 엄마가 말했다. “여자애들은 더 힘들었지. 일요일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줄곧 꼬마 숙녀처럼 굴어야 했으니까. 여자애들은 사내애들처럼 썰매를 타고 놀 수도 없었단다. 여자애들은 집안에 얌전히 앉아서 수를 놓아야 했지.” …날씨가 풀리자마자 로라와 메리는 맨발로 뛰어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처음에는 장작더미 주위와 뒤뜰만 뛰어다닐 수 있었다. 이튿날은 더 멀리까지 뛰어갈 수 있었다. 곧이어 로라와 메리의 구두는 기름칠을 한 뒤 신발장에 치워졌고, 로라와 메리는 온종일 맨발로 뛰어놀았다. 밤마다 로라와 메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발을 씻어야 했다. 치맛단 아래로 드러난 발목과 발은 갈색이 되었고, 얼굴도 갈색으로 그을렸다 ..  (92, 147∼148쪽)

 우리 시골집에서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와 둘째 돌보는 몫 또한 아버지가 맡습니다. 첫째로도 등허리가 휘니까 둘째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 씻기고 재우며 놀리고 가르치며 키우는 나날이란 그지없이 고달픕니다. 그렇지만 어느 어버이라도 이 고달픈 나날을 짊어졌으며, 고달픈 욱씬거림을 웃음꽃 하나로 잊습니다.

 참 놀랍지요. 100만 원을 주거나 100억 원을 준다고 싱긋방긋 웃음꽃을 피울까요. 고작 젖 한 번 물리거나 기껏 손 한 번 맞잡으며 춤을 출 뿐인데 아이들은 웃음꽃을 피웁니다. 꾸지람을 듣고 울다가도 이내 방글거립니다. 졸리면서 안 잔다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곱게 새근새근 곯아떨어집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댔지만, 웃는 낯에 시름을 씻습니다. 한 사람이 고운 목숨으로서 스스로 또다른 목숨을 곱게 낳아 키우는 일이란 뼈와 살과 피를 온통 발라내는 삶입니다.

 사랑이란 뼈와 살과 피를 모조리 발라낼 때에 이루어지지 입발림이나 돈치레로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삶이란 내 뼈와 살과 피를 아낌없이 발라낼 때에 일구지, 깨작거리는 손짓으로는 일구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맞이해서 사랑하는 삶이라 할 때에는 나 스스로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몸을 바치는 고운 목숨이 되면서, 이 목숨을 내 사랑이한테서 고스란히 선물받는 목숨이 되어야 합니다.

 (3) 이야기책 《초원의 집》 1권 “큰 숲 작은 집”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모두 아홉 권으로 이루어진 완전번역판에 붙은 이름은 《초원의 집》이지만, 이 이름은 한국에 번역된 연속극에 붙은 이름입니다. 더구나 “초원의 집”이라는 연속극 이름조차 일본사람이 영어를 옮겨 적은 이름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이름을 쓸 까닭이란 조금도 없습니다. 일본말을 한글로 적는다 해서 우리 말이 되거나 우리 이름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이름을 붙여야지요. 아니면 아예 미국사람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미국말로 붙인 이름으로 쓰든지요.

 가만히 보면, 한국사람은 참 어리석은데 어리석은 줄조차 느끼지 못하거나 살피지 못할 만큼 매우 어처구니없습니다. ‘산도’라는 과자이름은 일본사람이 붙인 이름입니다. 일본사람은 ‘샌드(sand)’라 말하지 못하니까 ‘산도’라 했고, 이 이름이 고스란히 ‘ㅋㄹㅇ산도’가 되었으며, 나중에 ‘ㅋㄹㅇ샌드’로 이름을 고쳤습니다만, 사람들이 영 알아봐 주지 않고 과자가 덜 팔리니까 다시금 일본 과자이름 그대로 ‘ㅋㄹㅇ산도’로 돌아갔습니다.

 일본사람이 붙인 “草原の家”가 아닌 우리 말 이름으로 “멧골집”이나 “두메집”처럼 이름을 붙이면, 산도라는 과자이름처럼 잘 알아보거나 널리 사랑해 주지 못할 한국사람이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름을 옳게 알아보지 못한대서 옳지 못한 이름을 끝까지 붙잡을 수 없어요. 오늘 어른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대로 쓴다지만, 오늘 어린이인 사람은 앞으로 어쩌지요. 오늘 어린이인 사람들은 오늘 어른인 사람들이 익숙한 대로 ‘잘못된 말과 삶과 이야기’도 잘못된 대로 멋모른 채 다시금 길들거나 익숙해져야 할는지요.

 더욱이,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살던 집은 “들판(초원)에 있던 집”이 아닙니다. 깊디깊은 숲속에 있던 집, 곧 두메집입니다. 멧골집입니다.

.. 하루나 한 주일, 아니 한 달 내내 북쪽으로 걸어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나무뿐이었다. 집도 없고, 길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 언덕에는 여우굴이 있었고, 사슴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 하루는 밤중에 아빠가 로라를 침대에서 안아올려, 늑대를 볼 수 있도록 창가로 데려갔다. 늑대 두 마리가 집 앞에 앉아 있었다. 늑대는 털북숭이 개처럼 보였다 … 로라는 아늑한 집, 아빠와 엄마, 난롯불과 음악이 먼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게 기뻤다. 지금은 지금이니까 결코 잊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절대로 먼 옛날일 수 없다 ..  (7, 8, 9, 222쪽)

 “큰 숲 작은 집”에서 살던 사람들 이야기가 ‘왜’ 큰 숲 작은 집인가를 처음부터 또렷하게 제대로 알아야 이 책 《초원의 집》 아홉 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냥 옛날 옛적 이야기를 다루는 《초원의 집》이 아닙니다.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웠지만 힘들기는 참말 힘들었으나 언제나 맑고 밝으면서 즐겁던 나날인 “큰 숲 작은 집”입니다.

 전기는커녕 겨울에는 물 한 그릇 쓰기조차 힘들 뿐 아니라, 물이 없으니 눈을 녹여서 써야 하는 멧자락 작은 집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아주 멀디멀리 떨어졌습니다. 식구들끼리 놀고 일하며 복닥여야 합니다. 옷과 밥과 집 모두 식구들 스스로 장만해야 합니다. 돈으로 사지 못하고, 돈이란 쓸모없습니다. 흙을 일구든 사냥을 하든, 모든 일을 시골집에서 스스로 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이 그칠 새 없으면서, 일이 그칠 새 없을지라도 네 식구가 알콩달콩 살아갑니다. 영화이든 책이든 컴퓨터이든 자동차이든 한 가지조차 없으나 늘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낮에는 해와 구름을 보고 밤에는 달과 별을 봅니다. 봄부터는 맨발로 살고, 살결은 늘 흙빛입니다. ‘들판에서 한갓지게 드러누워 양들 울음소리를 듣는’ 삶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숨막히지만 스스로 숨막으며 살아가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조촐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 메리는 자기가 로라보다 나이가 많으니가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로라는 자기가 더 작으니까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근 찌꺼기는 아주 맛있었다 … 집에 돌아가면 그 사탕을 어딘가에 잘 간수하여 영원히 간직할 작정이었다. 사탕이 너무 예뻐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 로라는 제 쿠키를 딱 절반만 먹었고, 메리도 제 쿠키를 딱 절반만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동생 캐리에게 주려고 남겨두었다. 집에 도착하면 로라와 메리는 캐리에게 반쪽짜리 쿠키를 하나씩 주었고, 결국 캐리는 온전한 쿠키 한 개를 먹게 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았다. 로라와 메리는 다만 캐리와 공평하게 나누어 먹고 싶었을 뿐이다 ..  (33, 164, 167쪽)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아무것 없는 삶일 수 있으나, 아무것 없어도 넉넉한 삶입니다. 오늘날 잣대로 보자면 양말 한 켤레 신 한 켤레 마련하자면 품이 얼마나 많이 드는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만, 알뜰히 마련한 양말 한 켤레는 알뜰히 신습니다.

 두메자락 멧골집 사람들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아니, 쓰레기라는 낱말을 모르겠지요. 무엇을 ‘버린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알뜰히 건사해서 알차게 씁니다. 물 한 방울과 풀잎 하나에 어떠한 우주가 깃들었는지를 삶으로 알고, 살결로 느낍니다.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깨닫고, 정보가 아닌 마음으로 나눕니다. 학벌이 아닌 사랑으로 사람을 만나며, 정치나 파벌이 아닌 믿음으로 사람을 사귑니다.

.. 포동포동하고 하얀 두 팔을 드러내고 맑은 물속에서 옥수수 낟알을 문지르거나 비벼대는 엄마는 정말 예뻐 보였다. 두 볼은 빨갛게 물들었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는 반짝반짝 빛났다. 엄마는 예쁜 드레스에 물 한 방울 튀긴 적이 없었다 ..  (204∼205쪽)

 요리 보나 조리 보나 하나같이 도시로만 몰려들어 도시에서 돈벌이 하나만 붙잡는 사람들한테 “큰 숲 작은 집” 이야기가 읽히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책을 읽는다 해서 두메자락 멧골집 삶을 헤아리거나 알아채거나 느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두메자락 멧골집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살아가지 않고서야 이 책 이 조고마한 이야기에 스민 눈물과 웃음을 맞아들이기 힘듭니다.

 살아가지 않고는 알 수 없거든요. 살아갈 때에 알거든요.

 밥이 익으며 솔솔 피어나는 내음은 밥을 하는 사람만 압니다. 다 차린 밥상을 받는 사람은 ‘밥 익는 내음’을 모릅니다. 지식이나 학문으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쌀을 일거나 씻어 불릴 때에 맑은 빛깔 쌀알이 차츰 하얀 빛깔로 바뀌는 모습은, 다 차린 밥상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정보로도 인터넷 찾아보기로도 캐낼 수 없습니다. 쌀알이 천천히 불면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쌀로 거두기 앞서 논자락에서 햇살을 받으며 노랗게 익을 때 벼포기가 들려주는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만화에서는 ‘초밥 잘 빚는 아이’가 여름날 무논에서 벼 익는 느낌까지 살리면서 초밥을 빚는다고 나옵니다만, 이런 느낌이란 스스로 겪을 때에 떠올리는 느낌이지, 누구한테서 이야기로 듣거나 책으로 읽는다 해서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요즈음 도시사람한테는 ‘맛있게 먹으면 그만’인 밥그릇이리라 봅니다. 《초원의 집》 이야기책 아홉 권 또한 ‘재미있게 읽으면 끝’인 소설이리라 생각하겠지요.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도시사람이 재미있게 읽으라’고 이런 글을 썼다고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예 당신 지난 삶자락이 아주 즐거우면서 좋았기 때문에, 아주 즐거우면서 좋았을 뿐 아니라 힘들며 춥고 고단하기도 했던 모든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당신부터 즐거이 돌아볼 이야기 한 보따리 꾸렸다고 느낍니다.

 다만, 《초원의 집》을 읽었으니까 시골로 가서 흙을 일구며 살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텃밭농사나 꽃그릇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곧, ‘흙을 일구는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손길’과 ‘햇살을 받는 살결’과 ‘햇볕을 고맙게 여기는 넋’과 ‘바람을 맞이하는 볼’과 ‘바람을 반기는 입술’과 ‘냇물에 담그는 발’과 ‘시리면서 시원한 물을 알아채는 몸’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내 삶을 차분히 가다듬는다면, 누구나 어디에서든 내 하루하루를 내 나름대로 아리따우면서 즐거이 누린다는 이야기를 건넨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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