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 찍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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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 찍자니까
  • 최종규
  • 승인 2011.03.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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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박경일, 《나의 카메라는 39.5℃》

 패션사진을 하는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라는 책에서 “티베트나 몽골의 원주민들이 정말 순박한 얼굴로 민속 옷을 입고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이 보일 뿐이지 그걸 찍은 작가의 인생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그런 사진을 보며 작가의 인생관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정작 나를 사로잡는 건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일 뿐이다(17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옳습니다. 왜냐하면, 티베트 민속 옷을 입은 사람들을 찍는다 해서 이런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으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인 줄 내세우는 작품들은 그다지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니까, 박경일 님 말처럼 ‘사진기를 바라보는 그 사람들 눈빛’이 보일 뿐입니다.

 참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다큐사진은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이면서 갈래를 나누자면 다큐사진이 될 뿐입니다. 먼저 사진답지 않고서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사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은커녕 다큐사진이 못 되고, 이런 사진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건네지 못합니다.

 참다이 사진이면서 다큐사진으로 갈래를 나눌 만한 사진을 들여다보면, 이 사진을 읽으면서 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과 삶을 함께 읽습니다. 애써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 손길과 다리품을 읽고, 이러한 사진을 우리한테 보여주려는 사람 삶과 꿈을 읽습니다.

 박경일 님은 “내 사진이 단순히 예쁘다거나 멋지다는 개념으로 불리는 패션사진이 아니라 그 안에 분명한 스토리가 있고 나만의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사진이 되기를 바란다(33쪽).”고 말합니다. 곧, 이야기가 녹아들지 않으면 ‘사진이 아니’요 ‘사진이 아니면서 패션사진 또한 아니’라는 셈입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 아니라면, 다큐멘터리라는 이야기를 느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따분하거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립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어야 다큐멘터리 이야기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박경일 님이든 다른 누구이든, 패션사진으로서 패션사진다웁기 앞서 사진으로서 사진다워야 합니다.

 사진으로서 사진다우려면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란 ‘내 삶이 깃든 사진’입니다. 내 이야기와 내 삶을 사진으로 깃들일 때에 ‘사진이 태어나’면서 ‘갈래를 나눌 때에 패션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박경일 님은 “처음 카메라를 메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가가 문제가 아니란 것이었다(34쪽).”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 해 보았자 ‘사진에 내 이야기가 담기’지 않습니다. 그저 예쁘장한 사진이 나올 뿐입니다. 길거리를 헤매면서 그럴듯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대서 ‘사진에 내 삶이 스미’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듯한 모습을 그럴싸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사진은 잘 찍은 작품이 아닙니다. 잘 찍은 작품이래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 가운데 잘 찍은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잘 찍는 틀이나 솜씨나 매무새가 사진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없고 삶이 깃들지 못한다면 사진도 문화도 예술도 삶도 아닙니다.

 박경일 님은 “내츄럴한 사진은 자연스러운 느낌만 잘 살면 약간의 허점도 문제되지 않고 도리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친밀감을 줄 수 있지만, 테크니컬한 사진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모델의 얼굴에 난 잡티 하나까지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쳐 버리기 때문이다(50쪽).” 하고 말하지만, ‘내츄럴’이건 ‘테크니컬’이건 조그마한 잡티 하나 때문에 사진이 망가지거나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사진으로 스며들면서 뜻밖에 놀라운 사진이 될 수 있다지만,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엉뚱하게 스며든 나머지 내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안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츄럴’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잡티 하나’ 때문에 다시 그 자리로 가서 다시 그 빛과 이야기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테크니컬’ 사진이기 때문에 잡티 하나로 사진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사진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빈틈이나 어수룩한 데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복판에 담는 모습이든 구석퉁이에 넣는 모습이든 모두 살피며 보듬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내츄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매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테크니컬’ 사진 또한 사람이 이루는 사진이기에, 이러한 사진에도 ‘사람다운 느낌’을 담지 않고서야 즐거이 마주할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어떤 순간을 기다려 포착해 내는 것만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을 평생 담아낼 수 없(61쪽)”습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리다 보면, 사진기를 쥔 내 앞에 ‘내가 담아서 그리고픈 이야기가 깃든 모습이 어느 한때에 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환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나타나는 환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내 삶을 일굴 때에 시나브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다시금 마땅한 노릇인데, “정 노출대로 찍으면 매번 달력 사진 같은 것밖에 나올 수가 없다(85쪽).”는 말은 틀립니다. 노출을 제대로 해서 찍는다고 왜 ‘달력 사진’일까요. 게다가 ‘달력 사진’이 노출을 ‘정 노출’로 할까요? 게다가 ‘정 노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진 노출’이란 사진기를 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느 사람은 더 밝게 볼 수 있고, 어느 사람은 더 어둡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종이에 뽑으려고 사진관에 맡기면 으레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올 듯한데?’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관에서는 제 사진을 ‘밝게 보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제가 찍은 사진빛 그대로 제 ‘노출’이니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 사진을 보는 분 가운데에는 ‘너무 어두운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딱 좋은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빛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제가 바라보는 빛이 가장 옳거나 좋거나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 빛은 제 빛을 뿐입니다. 바른 노출도 그른 노출도 넘치는 노출도 모자란 노출도 아니에요. 우리들이 사진기를 쥐며 ‘나한테 맞는 노출’을 찾자면, ‘내가 바라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알아채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창의성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진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공학과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원에서 스파르타 식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 가서 뭘 배울까 싶을 정도로 대학입시만을 위해 공부한다(84쪽).”고 하니까 ‘정 노출’이니 하고 생각하고야 맙니다.

 그런데 내 사진이 ‘달력 사진’이면 어떻습니까. 내 사진이 ‘예술사진’이어야 아름다운 사진일까요. 내 사진이 ‘일 등급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나는 내 사진길을 잘 걸었다 할 만하겠습니까. 내 사진을 남들이 어떻게 재거나 따지든, 내 사진에 내 이야기를 소롯이 담아 내 삶을 어여삐 보듬는 나날이라면, 내 사진길은 씩씩하며 당차고 기쁩니다.

 박경일 님은 “8×10 카메라로 만든 시리즈. 무거운 카메라만큼이나 모델도 나도 경직되어 있는 게 느껴진다(177쪽).”고도 말합니다. 무거운 사진기를 쓰니까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무거워질까요.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가벼워지나요. 값나가는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값나가는 사람으로 탈바꿈하는지요. 싸구려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싸구려로 나동그라지는가요.

 은행원이었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박경일 님 사진삶을 담은 책 《나의 카메라는 39.5℃》 책날개 첫머리에는 박경일 님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사진가가 된 은행원”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최고’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 가운데 ‘최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쟁이는 어떻게 사진을 해야 ‘첫손가락’이 될까요. 어떤 패션사진을 찍어서 선보여야 ‘으뜸’이 되는지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 있습니다. 사진이 돋보인다거나 사진이 놀랍다 할는지 모르나, 돋보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니며, 놀라운 사진이 대단한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이도 저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인 까닭에 ‘최고라 일컫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랑이니까 ‘첫손가락 꼽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진은 삶인 만큼 ‘으뜸으로 여길’ 삶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담아 좋아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에 “우리가 찍는 옷은 한복이 아니다. 전부 외국 디자이너들의 서양 옷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이 입은 느낌과 외국인들이 입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카락의 유럽 여자가 한복을 입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모습으로 창경궁에 앉아 있는 사진이 화보로 나가면 우리가 보기에도 ‘별난 사진이다’ 하는 정도지 ‘우아하고 단아하다’고 하지는 않는다(1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즈음에서 박경일 님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면서 책을 마무리합니다.

 한국에는 ‘패션’이 없습니다. 패션이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찍어 본댔자 패션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입는 옷은 ‘패션’이 아닌 ‘서양 옷’입니다. ‘한복을 걸친 서양사람’이 우스꽝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서양 옷을 걸친 한국사람’도 우스광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 옷을 입은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요. 온통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패션사진’은 ‘서양사람을 모델로 세워 서양 옷만 입히는 사진’에 머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는 사람은 패션사진도 한국사진도, 끝끝내 사진도 못 하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자면, ‘늘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 삶’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꿰뚫을 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 사진길을 걸어야 합니다. 까놓고 말해, 사진을 찍는 박경일 님 또한 한국 옷이 아닌 서양 옷을 입으며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는대서 서양사진이나 일본사진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한국사진을 찍습니다. 한국에 패션이 없고 패션사진이 없는 까닭을, 누구보다 ‘패션사진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 스스로 옳게 깨닫고 바르게 알아채며 슬기롭게 사진길을 가다듬으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은 자랑이 아닙니다.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진으로도 그림으로도 글로도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 나의 카메라는 39.5℃ (박경일 글·사진,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2007.1.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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