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한 내 하루하루를 만화로 살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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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 내 하루하루를 만화로 살가이
  • 최종규
  • 승인 2011.04.04 0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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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문계주, 《아프리카의 꿈》

 환경사랑을 한다는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면서 ‘o.k.’나 ‘땡큐’ 같은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섞는 일은, 환경사랑을 하자면서 과자봉지를 들판이나 멧길에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아무것 아니라 여길 수 있는 자그마한 말마디 하나를 곱게 돌볼 수 있을 때에 환경사랑이든 나라사랑이든 삶사랑이든 사람사랑이든 만화사랑이든 이룰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살아숨쉬는 만화란 살아숨쉬는 생각으로 그립니다. 살아숨쉬는 생각이란 내 마음과 몸이 튼튼하며 씩씩하게 살아숨쉴 때에 생깁니다. 내 마음이며 몸이 싱그러이 살아숨쉬도록 다스리지 못할 때에 내 생각이 살아숨쉴 수 없습니다. 내 마음과 몸이 사랑으로 가득할 때에 비로소 사랑이 태어나고, 이렇게 태어난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스러울 만화를 그립니다.

 새롭게 만화쟁이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고, 일찌감치 만화쟁이가 된 사람이 많으며, 오래도록 만화쟁이 한길을 걷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화쟁이가 되는 길이라든지 만화쟁이로 살아가는 길이란 남다르지 않습니다. 글쟁이로 살아가는 길이나 노래쟁이로 살아가는 길이나 흙쟁이로 살아가는 길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살림꾼으로 살아가거나 여느 일꾼으로 살아가는 길하고도 매한가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내 살림살이를 내 손으로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오롯이 깨달아서 아낌없이 껴안을 때에 비로소 만화에 어떠한 이야기를 담으면 좋으면서 즐거울까를 느낍니다. 내 살림살이를 내 손으로 일구는 나날을 이을 때에 시나브로 내 만화로 담아 이웃이랑 동무하고 어여쁘며 신나게 나눌 만화를 그리는 길을 알아챕니다.

- “아니, 저, 다른 기자들이 하도 많아서, 난 없어도.” “그게, 우리 신문사 기자던가?” “아니오. 하지만 똑같은 기사를 여러 신문사에서 싣는 건 지면 낭비라고 생각돼서…….” (15쪽)
- “미야는 우리와 틀려요. 어머니. 억지로 우리의 방식에 맞출 순 없어요. 그 아인 그 나름대로 삶과 생활이 있으니까. 저 애가 행복하길 원한다면 보내야 해요. 옛날, 우리가 오빠를 보냈던 것처럼 그렇게…….” (87쪽)

 문계주 님 만화책 《아프리카의 꿈》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습니다. 이 만화책이 처음 나오던 1993년에도 읽었고, 이 뒤로도 한두 번 더 장만해서 읽기도 한 작품인데, 얼마 앞서 헌책방마실을 하다가 다시금 눈에 뜨여서 또 장만해서 새삼스레 읽습니다.

 만화책 《아프리카의 꿈》은 1967년에 태어난 문계주 님이 스물여섯 나이에 내놓은 작품모음입니다. 모두 네 꼭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꿈〉과 한 꼭지로 마무리하는 짧은만화 〈하늘이 보이는 창〉하고 〈비오는 크리스마스〉에다가 두 꼭지로 끝맺는 짧은만화 〈이 겨울이 가기 전에〉를 담습니다.

 만화쟁이 문계주 님으로서는 스물여섯에 내놓은 만화책 《아프리카의 꿈》이고, 만화즐김이 저로서는 열여덟에 처음 만난 만화책 《아프리카의 꿈》입니다. 열여덟에 처음 읽은 《아프리카의 꿈》은 스물여섯 즈음에도 새로 읽었고 서른일곱 나이에 다시금 새로 읽습니다.

 책장을 넘기니 그림결이며 이야기이며 줄거리이며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넘기는 만화책이라 여기며 조마조마 두근두근 콩닥콩닥 마음으로 기쁘게 읽습니다.

 한 시간 만에 다 읽기에는 너무 아쉬워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읽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쪽을 덮으면서, 아, 이제 이 책을 또 다 읽었구나 느끼며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렇게 깨끗한 판으로 장만했으니까 잘 건사해서 마흔여섯이나 마흔여덟쯤 될 나이에 거듭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첫째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열 몇 살쯤 될 무렵 스스로 이 만화책을 읽을 수 있겠지요.

- ‘어느덧 변두리를 빠져나오자, 대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21쪽)
- “애비한테 얘기해 봐. 외국 생활이 힘들지?” “아, 아니요. 그냥, 밤하늘이 보고 싶어서. 오늘 따라 유난히 맑은 밤이라서. 그래서 그냥 잠들기 아쉬워서 그래요.” “그래. 그렇구나.” (67쪽)

 만화쟁이 문계주 님은 나이 스물여섯에 한창 맑고 밝은 빛과 기운을 뽐내며 《아프리카의 꿈》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 뒤로도 얼마든지 여러 만화책을 내놓을 법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요술쟁이》 뒤로는 좀처럼 다른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어린이책에 사잇그림을 그려 넣은 책이 몇 가지 나옵니다.

 요사이는 새 작품모음을 거의 만나지 못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한데, 제가 낱권책으로만 만화를 읽고 잡지만화로는 읽지 않기 때문에 소식을 모른다 할 수 있습니다. 잡지에 만화를 그리더라도 낱권책이 안 나올 수 있으니까요.

 꼭 나이로 쳐서가 아니라, 스물여섯 즈음부터 서른여섯을 거쳐 마흔여섯에 이르기까지 만화를 그리든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스스로 튼튼하며 빛나는 작품세계를 이룩하기 마련입니다. 문계주 님은 당신 삶에서 가장 빛나는 때에 만화창작을 한결 튼튼하거나 씩씩하게 잇지 못하고 말았다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퍽 많은 한국 만화쟁이들이 한창 빛나야 할 서른이나 마흔이나 쉰 나이에 만화꽃을 잘 못 피웁니다. 예순이나 일흔쯤 되는 나이라면 만화열매를 맺어 젊은 만화쟁이한테 좋은 길잡이나 밑거름이 될 만하지만, 이렇게 만화꽃이나 만화열매로까지 나아가는 어르신은 퍽 드뭅니다.

 언제나 새로운 삶을 부대끼면서 이러한 새로운 삶을 만화로 담는 만화쟁이인데, 새로운 삶을 일구기에는 새 만화를 실을 매체가 너무 적거나 새 만화를 책으로 빚어 내놓을 출판사가 너무 모자란 탓일까요. 만화쟁이 스스로 한결 새롭게 거듭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글이든 사진이든 만화이든, 글이나 사진이나 만화로 담는 이야기는 머나먼 남쪽나라나 멀디먼 북쪽나라에 있지 않습니다. 머나먼 남쪽나라나 멀디먼 북쪽나라에도 글이건 사진이건 만화에 담을 만한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우리 곁에도 좋은 이야기가 있으며,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 또한 좋은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 돌보는 삶이 곧바로 글이나 사진이나 만화로 담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혼자서 살든 여럿이서 살든 혼인해서 살든 헤어져서 따로 살든, 저마다 다 다르게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좋은 글감이고 사진감이다가는 만화감입니다.

- ‘나, 떠날 수 있을까. 이곳에 네가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보고 싶어.’ (73쪽)
- ‘나와 같이 가자. 이제 다시는 널 슬프게 하지 않을 거야.’ (85쪽)
- “또 내 얘기만. 나도 모르게 빠져들면 꼭 이래요. 지루하지요?” “아니오. 참 좋아요. 따스하구요. 고마워요.” (154쪽)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여기에 만화를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영화를 찍거나, 누구나 내 삶을 예쁘게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쁘게 사랑하는 내 삶을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만화로든 살포시 담으면 기쁘겠습니다.

 내 이야기를 그리고, 내 어머니 이야기를 그리며, 내 할머니 이야기를 그리면 됩니다. 내 이야기를 돌아보고, 내 동무 이야기를 살피며, 내 이웃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돼요.

 “아니오. 참 좋아요. 따스하구요. 고마워요.” 하고 대꾸할 말마디는 남쪽나라나 북쪽나라 이야기에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여느 이야기, 수수한 이야기, 투박한 이야기, 흔한 이야기에서 바로 “아니오, 참 좋아요. 따스하구요. 고마워요.” 하고 대꾸할 만한 사랑스러운 꿈이 태어납니다.

- “엄만, 누구 좋아한 적 있었어? 저기, 첫사랑 말이야.” “어머, 얘는! 10번도 더 해 봤는걸.” (107쪽)
- ‘누군가의 말처럼 만나면서 우리는 이별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때엔 다시 누굴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마도 나에겐 너무 아픈 기억이었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상처를 받을 땐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만큼은 성숙해진다는 걸 알았어.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만큼 사랑했고 아파했느냐는 거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일이니까.’ (109쪽)

 수수한 내 하루하루를 만화로 살가이 담으면 넉넉합니다. 수수한 내 하루하루를 살가이 담은 만화는 오래도록 물리지 않으며 즐길 수 있습니다. 수수한 내 하루하루를 살가이 보듬은 만화이기에 아이 아버지인 저부터 두고두고 즐겼으며, 우리 딸아이한테 물려줄 만하며, 우리 딸아이도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된 다음 제 딸아이를 낳는다면 언제까지나 예쁘게 사랑을 나누는 해맑은 이야기꽃이 흐드러지리라 믿습니다.

― 아프리카의 꿈 (문계주 그림·글,서화 펴냄,1993.6.25./판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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