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 어린이문학과 친일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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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어린이문학과 친일작품
  • 최종규
  • 승인 2011.04.0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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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책과 함께살기] 이원수, 《골목대장》

- 책이름 : 골목대장
- 글 : 이원수
- 그림 : 원혜영
- 펴낸곳 : 한겨레아이들 (2002.6.14.)
- 책값 : 7000원

 (1) 어린이·푸름이·어른

 아기로 자라는 나날은 다섯 해입니다. 어린이로 보내는 나날은 고작 일곱 해입니다. 푸름이로 지내는 나날은 기껏 여섯 해입니다. 열아홉 해째부터는 어른으로 살아가는 셈입니다. 열아홉이든 스물아홉이든 아흔아홉이든 똑같이 어른 삶입니다.

 어른으로 살아갈 나날은 참으로 길디길지만 아기를 지나 어린이와 푸름이로 살아가는 나날은 너무 짧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나 소나 닭 같은 짐승을 살펴보면, 어린 나날이나 푸른 나날은 훨씬 짧습니다. 참으로 금세 어른 짐승으로 우뚝 자랍니다.

 다만, 짐승이 어린 나날을 지나 어른 나날이 되는 동안을 사람하고 견준다면, 여느 짐승이나 여느 사람이나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비슷하게 어린 나날을 거치고 비슷하게 어른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짐승하고 사람은 한 가지에서 다릅니다. 짐승은 누구나 어린 나날을 끝마치면 저 스스로 먹이를 찾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짝을 찾습니다. 새끼를 낳으면 어느 짐승이든 제 새끼를 먹이며 보살피고 지킬 뿐 아니라, ‘어린 어른짐승’이 ‘어린 새끼짐승’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쳐야 할 온갖 삶과 슬기와 이야기를 고스란히 물려주거나 가르칩니다.

.. 큰오빠인지 하는 청년이 집에 온 후로 집안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 전에는 평화롭기만 하던 집안에 그 군인 생활을 하고 왔다는 큰오빠란 사람은 희수(개)나 미미(고양이)나 가리지 않고 발길로 차는 게 버릇이었다. “이놈의 개는 왜 이리 덤벼? 그런다고 좋아할 줄 알구?” … 꽃나무뿐이 아닙니다. 하루는 개울가에서 개구리들을 잡아 가지고 장난을 했습니다. 민수는 개구리를 잡아 쥐고 꼬챙이로 눈을 찔렀습니다. 개구리는 두 눈을 찔려 장님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아무리 말 못하는 개구리라도 아픈 건 사람이나 다를 리가 없습니다 … (꿈속에서) 다른 개구리가 말을 했습니다. “대장님, 우리 동무의 눈을 장님으로 만들었으니까 민수도 장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옳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두 개구리가 모두 찬성을 했습니다. “이의 없는가?” 대장 개구리가 물으니까 장님 개구리가 말을 했습니다. “대장님, 장님이 되니까 세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갑갑해서 못살겠으니 민수는 장님을 만들지 말고 나쁜 장난을 한 손을 잘라 주세요. 장님은 너무 갑갑합니다.” 민수는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습니다. 눈을 빼지 말라고 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손을 잘라 주라는 것도 여간 무섭지 않았습니다 ..  (11, 60, 69쪽)

 한국땅에서는 어린이와 푸름이로 살아가며 열아홉를 지난 이들 가운데 열아홉 해째부터 스스로 삶을 일구는 사람이란 대단히 드뭅니다. 서양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살피면, 푸름이 나이부터 저 혼자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른 아시아나 중남미도 엇비슷합니다. 한국땅 어린이와 푸름이만큼은 이제 어른으로 살아야 할 무렵에 참답게 어른으로 살아가지 못하거나 어른으로 살아내지 않습니다.

 나이는 미성년자를 벗어났대서 술과 담배와 사랑놀이를 마음껏 즐길 뿐, 참으로 어른다이 구는 어른이란 몹시 드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었다는 젊은이들은 길바닥에 침을 직직 뱉습니다. 젊은 사내들은 다리를 쩍쩍 벌리며 걷거나 전철 같은 데에서도 다리를 쩍 벌리며 앉습니다. 젊은 사내이든 계집이든, 젊은내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으레 욕이거나 거친 말입니다. 사랑스럽거나 따스하거나 믿음직한 말이라든지 매무새라든지 낯빛이라든지 몸짓이라든지 손길이라든지 눈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이제 막 열아홉이나 스물이 된 젊은이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지난해나 그러께에 열아홉이나 스물을 지난 젊은이도 매한가지입니다. 세 해 앞서나 다섯 해 앞서 열아홉이나 스물을 지난 젊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해나 스무 해 앞서 열아홉이나 스물 나이를 지난 젊은이도 똑같습니다.

 더 따지면, 서른 해나 마흔 해 앞서 열아홉 나이나 스물 나이를 지난 젊은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쉰 해 앞서나 예순 해 앞서도 엇비슷하겠지요.

 어른답지 못한 모습으로 어른이 된 사람들이 짝을 찾아 사랑놀이를 나누다가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돌봐야 좋은가를 깨닫거나 배우지 못한 채 아이만 먼저 덜컥 낳습니다. 아이를 낳은 다음 어떻게 애 어머니를 보살펴야 하거나 애 어머니로서 몸을 어찌 다스려야 하는가를 스스로 익히지도 않으나 둘레에서 찬찬히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애 아버지가 할 몫을 깨닫거나 배우려는 사내도 매우 드뭅니다. 이제 아이까지 딸렸으니 더 돈을 잘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할 뿐, 어버이 노릇이 무엇인지 살피지 못하고, 어버이 구실을 돌아볼 겨를을 내지 못합니다. 돈을 더 벌어야 한다지만, 어떤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벌어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톺아보지 못합니다.

.. 아무리 밥을 먹여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주인집 아들이라 하더라도 미워하고 구박하는 사람에게 꼬리 치고 아양을 떠는 건 비굴하다 … 온갖 새들이 제 맘대로 하늘을 날아 숲속에서 들로, 들에서 산으로 훨훨 돌아다니는데, 새장 속에 갇혀서 한평생을 살아온 앵문조는, 사람에 비하면 감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새장 안에서 자라서, 넣어 주는 모이와 물을 먹으며 편히 살아온 우리 앵문조는 바깥 세상의 많은 적과 싸워 나갈 힘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이를 구할 줄도 모르고, 추운 겨울이 오면 얼어죽을지도 모릅니다. 밤이 되어도 편안하고 안전한 잠자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긴 하지만, 알에서 났을 때부터 새장 속에서만 자란 우리 앵문조에게는 저 넓은 바깥 세상이 얼마나 놀랍고 크고 신기하고 화려했을까요! … “주는 모이만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어 온 새가 아니냐? 늘 편하게만 살아왔거든. 그러니까 제힘으로 먹이를 찾고, 잠자리를 찾고, 또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내고 할 힘이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남의 원조만 받는 사람들은 영영 독립도 못하겠네요?” ..  (18∼19, 90∼91, 92쪽)

 몸뚱이로 보면 틀림없이 어른입니다. 나이로 치면 어김없이 어른입니다.

 그러나 몸뚱이와 나이로만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할아버지·할머니가 될 테지요. 그런데 나이를 많이 먹었대서 나이값을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대서 더 해맑거나 착하거나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제 나이에 걸맞게 살아가는 고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살며, 푸름이는 푸름이대로 살아야 합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살아야겠지요.

 어른이 되기 앞서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버이한테서 밥과 옷과 집을 받습니다. 아주 마땅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밥과 옷과 집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살림을 가르칩니다. 어른은 아이한테 삶을 가르칩니다.

 말은 교과서나 교재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살아가며 쓰는 말을 아이한테 고스란히 가르칩니다. 살림은 요리책이나 육아책 따위를 들여다보며 가르칠 수 없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꾸리는 살림을 아이한테 그대로 가르칩니다. 삶은 무슨 책이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배워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삶 또한 언제나 어버이 스스로 꾸리는 나날을 낱낱이 보여주며 가르칠 뿐입니다.

.. “이 할머니, 괜히 사람 곯리지 말아요. 이 집에서 안 떠난다고 공사를 중단할 것 같소?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란 말요.”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 반은 호령조로 반은 빈정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 노랑나비 한 마리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미 101호 곁으로 날아오다가 못 본 체하고 아래쪽 땅에 붙어서 핀 민들레꽃에 가서 앉았습니다. 노랑나비는 노란 민들레꽃을 얼싸안고 꽃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민들레야, 넌 참 귀엽구나. 네 꿀은 달기도 하고.” “부끄러워요. 내가 뭐 예쁘기나 해요? 저기 저 장미는 꽃 중에서도 제일 예쁘다던데요.” “모르는 소리 마. 저건 가짜야. 저런 건 백 개 천 개 있어도 소용없단다.” “어째서요?” “저런 생명 없는 꽃이 무슨 꽃이냐. 꽃이란 너처럼 살아 있는 것이라야 해.” ..  (39, 100쪽)

 아이들은 밥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밥하기를 배운 뒤에는 밥상을 차려 젓가락질과 숟가락질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밥상에서는 어떻게 하고, 밥을 먹고 나서 어떻게 치우며 설거지는 또 어찌저찌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밥하기를 할 때에는 날마다 먹는 밥을 어떻게 마련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밥 한 그릇을 차리기까지 어느 만큼 품과 땀과 겨를을 들이는지를 몸으로 배워야 합니다. 먹고 남은 밥쓰레기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또한 몸으로 배워야 합니다. 환경책에 적힌 숫자나 통계로 배울 수 없습니다. 해마다 한국에서 나오는 밥쓰레기만 하더라도 몇 조에 이른다는 숫자를 안다 한들 밥쓰레기를 잘 치울 수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옷을 다 돈을 치러 사서 입는다지만, 옷을 돈으로 사서 입는다 하더라도 단추를 꿰거나 구멍난 데를 기우는 바느질쯤은 누구나 어린이일 때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웨덴 어린이 “말괄량이 삐삐”는 아홉 살인데, 삐삐하고 함께 살아가는 원숭이가 입는 옷을 삐삐가 손수 뜨개해서 입히고, 말한테도 목도리를 뜨개해서 씌웁니다. 삐삐하고 살가운 동무인 토미와 아니카 또한 스스로 신는 양말이나 스스로 끼는 장갑쯤은 스스로 뜨개질을 해서 마련합니다. 게다가 성탄절 선물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뜨개옷’을 하나씩 드립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는 아픈 몸과 마음을 다스리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뜨개질을 합니다. 옆지기한테 뜨개질이란 삶입니다. 취미나 무슨 다른 이름을 붙이는 뭔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내 옷을 내 손으로 마련해서 입어야지, 누구 손을 빌거나 이런저런 돈을 들인다고 다 될 수 없어요.

 손수 하는 일이고, 몸소 꾸리는 삶입니다. 손을 움직이며 배우는 일과 놀이이며, 몸을 써서 하루하루 일구는 삶입니다.

.. 바위는 소나무에게 이렇게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군인들의 총을 맞아 이 꼴이 됐단다. 북쪽 군대를 위해 남쪽의 내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남쪽 군대를 위해 북쪽의 내 얼굴이 또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나는 이 상처를 내 훈장으로 생각한단다.” 소나무들은 얘기를 듣고 있다가 마지막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바위 아저씨, 아저씨는 이쪽도 저쪽도 위해 주었다지만, 어떻게 그렇게만 말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이쪽도 저쪽도 괴롭힌 거예요. 아저씨 옆에 있는 군인들은 좋았겠지만 먼 쪽에 있는 군인들은 아저씨 때문에 적을 맞히지도 못하고 총에 맞아 죽었을 거 아녜요? 상처가 무슨 훈장이라고 그러셔요?” 소나무의 불평에 바위는 ‘응!’ 하고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소나무들아,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 말을 하겠지만,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너희들은 모른다.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고 있는 나는 이 땅 이 나라 사람들이 곧 내게 가까운 사람이란다. 이 나라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참 이상한 일이 아니냐? 천 년도 훨씬 전에 싸우는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얘기한 그 총싸움도 같은 이 나라 사람들끼리 하는 전쟁이었어. 왜 그러지? 왜 한나라 사람끼리 싸우는가 말이다. 이 몸에 당한 상처가 모두 나의 훈장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이 나라 사람들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야.” ..  (116∼118쪽)

 이 나라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자라지 못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 또한 푸름이로서 크지 못합니다. 이 나라 어린이랑 푸름이는 그저 대학바라기 시험기계로 길들여집니다. 열아홉이 되고 스물이 되더라도, 제 손으로 밥 한 그릇 차릴 줄 모를 뿐더러, 텃밭에서 푸성귀를 기른다든지 논에서 벼를 돌본다든지 할 줄을 모릅니다. 바느질이건 뜨개질이건 하지 못하는 채, 빨래며 살림하기며 아이키우기며 도무지 모릅니다. 아니, 어린이와 푸름이가 모르기 앞서, 어린이와 푸름이를 보살핀다는 어른부터 모릅니다.

 어른부터 제 삶이 없습니다. 어른부터 제 삶을 일구지 않습니다. 어른부터 엉망진창입니다. 어른부터 좋은 삶·착한 삶·고운 삶이 무엇인지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돈벌이에 바쁩니다. 어른들은 돈벌이 때문에 빠듯합니다. 어른들은 돈벌이를 하느라 아웅다웅 다툽니다. 어른들은 책 한 권을 손에 쥐어도 돈벌이하고 이어진 책 아니면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이런 엉터리 바보 똥개 밥통 멍텅구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돌볼 수 있을까요. 그저 지식덩어리인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무슨 삶을 밝히거나 보여줄 수 있는가요. 지식덩어리 어른은 지식덩어리 아이를 낳습니다. 돈벌이에 매인 어른은 돈벌이에 길든 아이를 만듭니다.

 (2) 이원수 문학을 아이들한테 읽히는 까닭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 작품 열 가지를 그러모은 동화책 《골목대장》을 읽습니다. 1958년 작품부터 1974년 작품까지 골고루 깃든 《골목대장》을 생각하면, 가장 오래된 작품은 자그마치 쉰 해가 지났고, 가장 요새 작품조차 마흔 해 가까이 됩니다.

 퍽 해묵은 작품을 아이들한테 읽히려 하는구나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쓴 지 제법 오래되었다 해서 해묵은 작품이지 않습니다. 1958년에 쓴 동화이기 때문에 2008년에 쓴 동화보다 읽힐 값어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1974년 동화는 2004년 동화만큼 아이들이 사랑하기 어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빛나는 문학’을 읽혀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새로운 문학’을 읽혀도 좋겠습니다만, 빛나지 않으면서 새롭기만 한 문학이라면 구태여 읽히지 않아도 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아름다운 문학’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재미난 문학’을 읽혀도 좋겠습니다만, 킥킥 웃도록 이끌기는 하되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담는다면, 이런 글은 문학이라는 이름이나 동화라는 이름이나 하나도 안 어울립니다.

.. 이 할머니는 주막을 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일은 농사일이었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산골의 논밭 뙈기를 조금씩 사 모아 며느리와 같이 농사를 지어 왔다. 마흔이 가까워진 며느리가 곧 숙희의 어머니다. 숙희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그 산밭을 갈고 논을 만지며 살아오는 억척스런 여자였다. 남자가 없는 집안이라 할머니와 며느리와 손녀-여자들만이 살아가는 힘겨운 살림이었다. 그러나 여자 세 사람은 늙은이는 늙었어도, 숙희는 어렸어도, 다 부지런하고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아서 따스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 그렇지만 대대로 물려받아 살아온 집을 버리고 떠나기는 누구나 싫어했다. 땀흘려 가꾸어 온 논밭이 물 속에 잠겨 버리는 것은 누구나 아깝고 원통한 일이었다 … 나라가 남북으로 두 조각이 나서 서로 다니지 못하는 경계선이 바로 길순이가 사는 동네 근처에 생겼던 것이다. 왜 그런 경계선이 생겨야 하는지 길순이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길순이의 아버지도 그 까닭을 잘 몰랐고, 그런 것이 생겨서 장사를 다니기 어렵게 된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  (36∼37, 124쪽)

 이원수 님은 온삶을 어린이사랑으로 꾸린 분입니다. 오로지 어린이사랑으로 글을 쓰고 문학을 하며 책을 묶었습니다. 어린이가 어린 나날을 알차고 아름다이 보내면서 빛나는 푸름이로 살아낸 다음, 씩씩하며 튼튼한 어른이 되기를 꿈꾸는 글과 문학과 책을 선물처럼 남기고 1981년에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에는 동심천사주의라든지 반공이라든지 따분한 훈계라든지 깃들지 않습니다.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에는 오직 따뜻한 사랑과 착한 믿음만 깃듭니다. 어린이가 받아먹을 마음밥이란 오직 따뜻한 사랑과 착한 믿음뿐이라 여기며 태어난 이원수 어린이문학입니다. 《골목대장》에 실린 열 가지 이야기 또한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착하며 따스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는 넋으로 가득합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고 내 동무를 아끼며 내 살붙이를 보듬을 줄 아는 포근함과 넉넉함이 깊이 스밉니다.

 전쟁을 슬퍼하며 평화를 기뻐하는 착한 사람 눈물을 담습니다. 싸움을 멀리하며 어깨동무를 좋아하는 예쁜 사람 웃음을 담습니다. 흙과 땀과 햇볕을 사랑하되, 돈과 이름값과 힘(권력)을 멀리하는 고운 사람 굳은살을 담습니다.

.. 일요일, 나는 오빠 무덤에 올 때마다 오빠가 죽고 난 뒤 (1960년) 4월 26일에 일어난 일과 그 후의 일들을 오빠한테 얘기하듯 일러 줍니다. 무덤 앞에 앉아서 꼭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하듯이 종알종알 속삭여 줍니다. 속삭여 주어도 속삭여 주어도 마음이 시우너하지는 않았습니다 … 오빠 동무라는 그 학생은 “죽은 사람들의 귀가 땅 위의 일을 지켜 듣고 있듯이, 우리도 땅 위에서 나쁜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아야 하는 거란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도둑질하는 사람이 생기면 끝까지 그런 사람을 내쫓아야 하니까 말이야.” … “만든 꽃은 오래 가죠. 생명이 없는 것이니까 새삼스레 시들거나 죽거나 할 까닭도 없지요.” ..  (80, 85∼86, 104쪽)

 그런데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 나라에 친일시 안 쓴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생각한다면 끔찍하도록 괴로우면서 슬픕니다. 일제강점기에 감옥에서 숨지거나 떵떵거리는 부자라서 친일시 따위야 쓸 일이 없다는 사람들 아니라면 친일문학을 안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몸이 튼튼하고 마음 또한 튼튼해서 그 어떤 모진 괴롭힘과 들볶음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친일문학에 손을 대고 마는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이원수 님이 당신 친일문학을 뉘우치지 않은 채 죽었다면서 나무랍니다. 어떤 이는 이원수 님이 당신 친일문학을 놓고 딱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반공문학과 동심천사주의가 판치는 슬픈 독재나라(이원수 님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 독재자가 나라를 무섭게 짓누르던 1981년에 흙으로 돌아갔습니다)에서 어린이문학을 곧게 지키려 하면서 당신 티끌을 밝힐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틀림없는 소리로, 이원수 님 친일문학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낱낱이 꾸짖고 밝혀야 합니다. 죄값을 씻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잘못을 밝히면서 죄값을 씻어야지요.

 잘못을 저질렀으니 손목아지나 목아지나 팔다리쯤 뎅겅뎅겅 잘라서 죽이면 되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철부지들은 모조로 산 채로 땅에 파묻으면 되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기에 한결 따스히 타이르며 보듬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켜보면서 더 사랑해야 합니다. 예부터 미운 아이한테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던 말을 곱씹어야 합니다. 밉기 때문에, 안타깝기 때문에, 불쌍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저지른 잘못을 돌이키지 못한 친일문학자가 한국땅에 몹시 많습니다. 너무도 많습니다. 잘못을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자꾸자꾸 이은 바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한 번 저지른 잘못을 좀처럼 씻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이원수 님 같은 사람이 똑같이 화살을 맞습니다.

.. 무쇠의 일당은 관가에 불손한 놈들이라 하는 말을 듣자, 솔이는 아버지와 솔이도 그러한 죄를 지은 일을 생각하고, 무쇠라는 도둑이 정말 나쁜 사람인지 의심이 들었다. 죄 없는 아버지를 잡아다 생명이 위독할 만큼 때린 관가였다. 관가에 불손하다 하여 아버지는 혹독한 매를 맞지 않았는가? 그런 것 보면 무쇠 일당도, 어쩌면 솔이 아버지가 칭찬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170쪽)

 잘못은 잘못대로 다스리면서 죄값을 씻도록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늘 그러하지요? ‘네 녀석, 깨진 그릇을 어쩔 테냐? 너, 그릇을 깼으니 네 손목도 깨자!’ 하면서 작두로 손목을 삭둑 자를 어버이나 교사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잘못한 사람한테 잘못을 찬찬히 묻고 스스로 뉘우치도록 하면서 ‘죄를 씻는 길을 걷도록’ 하는 어버이나 교사가 아닌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은 당신 나이 서른두어 살 무렵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원수 님은 가난한 채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친일시를 썼습니다. 이러던 1945년, 당신 나이 서른다섯이 될 무렵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을 맞이했으나 여느 사람처럼 마음 활짝 열어 기쁨에 젖을 수는 없으나, 당신이 끌어들인 티끌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저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때부터 이원수 어린이문학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당신 스스로 가난한 삶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씻으려고 슬프며 힘든 길을 말없이 걸어갑니다.

 어떤 이들은 금세 사과글이니 반성문이니를 씁니다. 이원수 님은 이런 종잇장은 한 번도 안 씁니다. 사과글이나 반성문을 썼으면서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원수 님은 반성문이나 사과글이 아니라 ‘어린이문학 작품을 더 바지런히 더 아름답게 쓰는 길’로 우리 앞에서 뉘우쳤습니다. 나라밖 좋은 어린이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미운 새끼오리》나 《장발장》이나 《꿀벌 마야의 모험》이나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비롯해 추리문학이나 공상과학동화 가리지 않고 참으로 많은 나라밖 좋은 어린이문학을 우리 말로 옮겨 우리 아이들한테 읽히면서 당신 스스로 좋은 창작을 내놓고자 온힘을 바쳤습니다. 이러면서 페스탈로치 같은 분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알려주려고 위인전을 쓰거나 나라밖 위인전을 우리 말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 아! 마음은 하느님에게 가 있을까? 가엾은 희수(개)의 마음도 하느님이 데리고 계실까? … 아! 자유를 좋아할 줄 알고 독립을 좋아할 줄 아는 우리 앵문조는 훌륭한 새가 아닙니까? 갇힌 몸으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들 그게 행복한 생활은 아니겠지요! ..  (27, 96쪽)

 나는 한 아이 아버지이자, 곧 두 아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이런 짓을 안 하겠다.’ 하고 입으로 밝히는 일도 해야겠으나, 입으로만 밝히기 앞서 몸으로 밝히고, 삶으로 오래오래 한결같이 지킬 수 있어야 두 아이한테 아버지답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를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옆지기 앞에서도 글이나 말에 앞서 몸과 삶으로 아름답고 착하며 참다이 어깨동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보람이나 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입으로 읊는 ‘사랑해’도 사랑스럽겠지요. 그렇지만, 참사랑은 애써 말로 나타내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알아챕니다. 몸과 마음으로 느낄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이원수 님이 몸이 아파 병원 침대에 누워 밥을 못 먹고 호스를 코에 찔러 영양분을 넣으면서 글쓰기는커녕 말하기조차 못하던 때에 ‘나오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내어’ 당신 따님한테 들려준 마지막말이자 마지막 어린이문학인 동시 〈겨울 물오리〉에 나오는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제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하는 노래처럼 아름다우면서 눈물겨운 반성문이자 사과글은 이 땅에 둘도 셋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살아가며 푸름이답게 크고, 바야흐로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쁜 어른이 되도록 사랑과 믿음을 바쳐야 할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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