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 이선비 만신 '하직굿'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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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 이선비 만신 '하직굿'을 열다
  • 김주희
  • 승인 2011.04.1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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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일 문학굿당서 마지막 '황해도평산소놀음굿' 한 판

취재: 김주희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90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보유자 이선비 만신(사진=황해도평산소놀음굿보존회)

"아쉽냐고? 아쉬울 것 하나도 없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삼남매는 잘 커줬고, 여든다섯 남편도 정정하다. 내일모레 여든이 되지만 아직 굿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도 건강하다. 이럴 때 신을 편안히 넘겨야 하지 않겠나."

인간문화재 이선비(77) 만신이 '하직굿' 판을 벌인다.

오는 17·18일 이틀간 문학산 문학굿당에서 펼쳐질 이번 굿은 이선비 만신이 중요무형재 제90호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보유자로서 하는 마지막 굿판이다.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은 황해도 평산 출신 故 장보배(1915~1991) 만신이 1985년 인천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오늘에 이른다. 1988년8월1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황해도 평산 지역에서 무당이 소모양으로 꾸미고 노는 굿놀이로, 농사가 잘 되고 자손이 번영하길 바라며 벌이는 굿판이다. 오락성과 예술성을 지닌 '제의'이자 '놀이'이다. 무당이 주도한 '놀이'라 강한 종교적 성격을 띤다.

인천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이어온 전통 놀이와 제의가 여럿 있다. 소놀음굿을 비롯해, 김금화 만신의 서해안풍어제, 그리고 은율탈춤 등이 있다.

그 중 소놀음굿은 동구 화도진 공원에서 볼 수 있는데, 최근에는 연극적 요소가 더해져 공연 형식으로도 진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연히 소놀음굿은 무당이 주도하는 굿판이다.

 황해도평산소놀음굿 현 보유자 이선비 만신은 두 번째 '신어머니'인 장보배 만신이 세상을 뜬 1년 뒤인 1992년 7월1일 보유자로 됐다.

그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어릴 적에는 옹진군(당시에는 황해도) 흥인면 소포리에서 성장했다. 6·25 한국전쟁 중이던 18살 나이에 결혼해 전남 고흥까지 이어진 피란길이 신혼생활이었다.

전쟁이 멈추자 부평과 김포 등지에서 1년여간 살다가, 지금 사는 동구 화수동에 정착했다. 인근 북성포구나 화수부두 등이 당시 조기파시로 유명했던 터라, 조기를 가져다 서울 등지에서 팔아 생활했다.

그러다 28살에 갑자기 병을 앓았다. 병원 어디에서도 고칠 수 없다고 했다.

신이 들었다. 황해도 출신 '돌깨만신'이라고 한 유씨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무당이 됐다.

"무당이라고는 알았지만 내가 무당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신어머니(유씨)가 가시밭길 천리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무당은 남편이 12명이라고도 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군인이며 깡패 등 사내들이 노리갯감으로 여겼다. 자식들도 무당의 아들이고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여전히 무당이 '일부종사'하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손주 녀석이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할머니가 국가 문화재다'라고 자랑을 했다. 손주가 학교 친구들하고 선생님까지 화도진공원으로 데리고 왔다"

신어머니 유씨가 내림굿을 해준 지 1년 만에 세상을 뜨자, 이선비 만신은 유씨의 신동기인 장보배 만신을 두 번째 신어머니로 모시게 됐다. 그렇게 황해도 평산소놀음굿과 인연을 맺었다.

소놀음굿을 지키고자 했던 장보배 만신의 뜻을 본격적으로 잇기로 마음을 먹은 때가 쉰을 넘기고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무당'으로서만 살았다.

한국전쟁 후 소놀음굿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85년 8월 인천국악원에서다. 당시 75세였던 장보배 만신이 어릴 적 배웠던 소놀음굿을 재현한 것이다. 이후 1986년과 1987년 일반 대중에게 선보이며 대중화했다. 한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해 우수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1988년 8월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됐다.

총 열다섯 거리로 짜인 큰 굿판으로 보통 해가 질 무렵에 시작해 동이 트는 새벽까지 계속된다. 이번 하직굿은 평소와 다르게 오전 9시부터 진행된다.

소놀음굿이 여느 굿판과 다른 것은 굿이 끝나고 나서 모든 잡귀를 쫓는다는 뜻으로 쌍작두를 타고 그네뛰기를 하는 일이다. 작두날 위에 서서 그네를 타는 만신은 현재 전국에서 이선비 만신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선비(왼쪽) 만신과 이수자 김혜숙 만신무당은 죽을 때까지 무당이다. 죽기 전까지 신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무당은 신을 놓는 일을 자신의 심장을 내놓는 것과 같이 여긴다고 한다.

17·18일 이틀간 벌이는 이번 '하직굿'은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의 전통을 잇기 위한 이선비 만신의 뜻이 담겨 있다.

이선비 만신 꿈에 신어머니 유씨 할미가 와서 '네가 알고 내가 아는 애를 만날  거다'라고 했던 이가 제자 김혜숙 만신이다. 7년여 동안 요모조모 살펴보니 소놀음굿을 넘겨줘도 될 거라 여겼다. 무당이 죽으면 신도 따라 죽고, 어느 무당도 죽은 신을 모시지 않기에 몸이 성할 때 소놀음굿을 넘기기로 했다.

이번 하직굿에서 이선비 만신은 자신이 물려받은 신어머니의 유품('구업이'라고 한다)과 신기물 등 무구(巫具)와 무화(巫花)를 김혜숙 만신에게 물려준다.

이선비 만신은 바라는 건 없다고 했다.

"마음이 편하고 든든하다. (제자 김혜숙 만신이) 신명을 잘 모시고 내가 갑갑할  때 데리고 다니고, 한 달에 용돈 조금 주면 그만이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김혜숙 만신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나는) 뒷받침하기만 하면 된다."

수십 년을 모신 신을 떠나보내는 일이지만 어찌 아쉽지 않을까. 제자 김혜숙 만신은 하직굿 판이 벌어지면. 무당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하직굿판)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에 눈물바다가 될 거라고 했다.

이선비 만신은 그래도 아쉽지는 않다고도 했다. 다만 떠나온 고향 산천이 그리울 뿐이다.

"옛날에는 굿하러 연평도에 자주 갔다. 연평도 산에 오르면 우리 동네 큰 산이 다 보인다. 소 끌고 다니는 모습이며, 굴뚝에서 연기 나는 걸 보면 심난해 (연평도에) 못 가겠다. 십수 년을 연평도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고향 가고 싶은 생각엔 한이 없다."


이선비(사진 왼쪽 두 번째) 만신과 황해도평산소놀음굿 보존회 전수조교,
그리고 김혜숙(사진 맨 오른쪽) 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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