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지초당'에 소장된 《세한도》, 고고한 필의, 조선왕조 500년의 최고의 걸작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완원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경학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조인영·권돈인·신관호·조면호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은 경세치용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화엄사라는 가족의 원찰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백파와 초의,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영정의 제사와 발문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선지식(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미칭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국서와 국화풍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조맹부·소동파·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한·위시대의 여러 예서체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것이 바로 졸박 청고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특히 그는 난을 잘 쳤다. 난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 고아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허유·이하응·전기·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와 「모질도」·「부작란도」 등이 특히 유명하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비파서도가 낳은 등석여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 1766~1837)이 1824년 과천에 마련한 별서로, 13년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추사 가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정원과 숲, 연못 등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1837년(헌종 3)에 김노경이 세상을 떠나자 김정희는 부친의 묘를 이곳에서 가까운 옥녀봉 중턱 검단에 안치하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렀다.
그 뒤로도 초당을 자주 찾았으며,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 3) 8월 이후부터 185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말년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2007년 과천시에서 2,055㎡ 부지에 한옥 2동(66㎡) 규모로 과지초당을 복원, 초당 인근에 있던 항아리로 만든 ‘독우물’을 배치하고 소규모 공원도 함께 조성하여, 11월 29일 준공하였다. 안채에 걸려 있는 ‘과지초당’ 휘호는 가산 최영환이 썼다.
과천 추사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세한도는 완당이 1840년(헌종6년)에 윤상도의 투옥 사건에 관련되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59세 때(1844년)의 작품으로서, 당시 청의 연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일품이다.
우선 이상적이 권세를 따르는 세속과는 달리 문하의 구의를 잊지 않고 궁경의 완당에게 정의를 다하는 데 감격해서 세한(겨울에 홀로 푸른 소나무)에 비유한 그림이다. 이 《세한도》야 말로 그 화격이나 고고한 필의로 보아 조선왕조 500년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