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할머니는 "우리 가족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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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할머니는 "우리 가족 아니야"
  • 이혜정
  • 승인 2011.05.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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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보다 조부모가족 인식 40% 하락 - '윤리교육' 강화 절실


취재 : 이혜정 기자

최근 우리나라 국민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국민 10명 중 8명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에 대해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젊은 부모들의 인식개선과 교육현장 일선에서 도덕과 윤리 교육 강화는 물론 가족 간 의사소통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인천시 남구 숭의4동에 사는 남모(85) 할머니는 지난 설 명절에 만난 손자·손녀에게 느낀 서운함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지만 1년에 만나는 횟수는 고작 2~3일 정도. 주로 명절이나 생일이 전부다. 큰 아들은 사업한다며 이곳저곳을 다닌다는 핑계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둘째 아들은 명절이나 돼야 찾아와 밥상 한 번 차려주는 정도다. 셋째 아들은 충청도에 살고 있어 전화나 가끔 한다. 그나마 가까이 사는 딸 내외는 맞벌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손자·손녀들과도 만날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 왕래가 적으니 사이도 데면데면하다. 더군다나 손자·손녀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니 사이는 더욱 서먹하다.

김 할머니는 '지난 설 명절에는 하룻밤은 자고 가겠지' 하고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실망만 클 뿐 '컴퓨터도 없고 재미없다'며 집에 가자고 성화를 부리는 손자와 손녀 모습에 서운함만 커졌다. 또 막내 딸 손녀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집에 가자고 재촉해 김 할머니 스스로 '어여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부모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가족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급격히 짙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어르신들의 소외감도 증폭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8월~10월 전국 2500가구 47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2차 가족실태'에 따르면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를 가족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각각 23.4%와 20.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10명 중 8명이 조부모를 가족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난 2005년 '제1차 가족실태' 보고서에서 친조부모와 외조부모를 가족으로 인식한다는 응답이 각각 63.8%와 47.6%였다. 불과 5년 만에 급격하게 변화했다.

특히 2005년 제1차 가족실태에서는 부모와 배우자의 부모를 가족으로 인식한 비율이 각각 92.8%, 79.2%였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이 비율이 각각 77.6%, 50.5%로 각각 15.2%와 28.7%로 감소했다.

한규만 한국가정상담연구소 부소장은 "가족의 형태가 생활구조나 사회 환경 변화에 따라 과거와 달리 많이 변화됐다"면서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의식하지 않아도 가족이라고 인식을 했으나, 핵가족화하면서 조부모가 가족 범위에서 멀어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노부모 부양의식 약화

가족의 범위가 점차적으로 좁아지면서 그동안 가족 안에서 해결하던 노부모에 대한 부양 의식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더구나 노인 중 상당수가 노후를 준비하지 못해 노년기의 가장 큰 어려움이 경제적인 요인으로 손꼽힐 만큼 자녀에게 의존하기 일쑤인 게 현실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37.6%가 자녀 또는 친척의 지원으로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홀몸노인의 경우 43.5%가 자녀나 친척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또 노부모 부양에 대한 자녀의 부담감은 앞으로도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년층 10명 중 6명이 노후준비를 하지 못했고, 이 가운데 '자녀에게 의탁하겠다'는 답변이 39.5%로 나타났다. 홀몸노인의 경우 '자녀·친척'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43.5%로 노후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자녀에게 의탁하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대책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부모는 물론 부모조차 가족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박미희 연수구 건강가정지원센터장은 "40~50대 기성세대들은 노부모에 대한 부양을 기본적인 도리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경제적 지원을 해왔지만, 연령층이 낮은 젊은 세대의 경우 노부모를 가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축소되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부모 부양에 대한 당위성이 약화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 소외감 느끼는 노년층 급증

전문가들은 가족범위 축소로 발생할 또 다른 문제를 노년층의 정서적 외로움으로 꼽고 있다. 노부모와 함께 살지 않은 자녀들이 증가하면서 물질적 부양과 더불어 정서적 부양도 외면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인천시 남구 숭의동 김모(80) 할머니는 2남 1녀를 두었다. 김 할머니는 평소 경로당에서 증권회사에 다니는 큰 아들과 대기업에 다니는 둘째 아들 자랑을 자주한다. 하지만 점점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자주 없고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이 내심 서운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힘들게 벌어서 대학에 보내고 유학까지 보냈더니 자기네 살겠다고 부모는 안중에도 없다"면서 "별 것도 아니고 안부전화 한 통만 해주면 좋을 텐데, 그게 뭐가 그리 힘든지 너무 섭섭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가 세상 떠난 뒤 제사 잘 모실 생각 말고 생전에 잘해야하는 걸 알아야 한다"고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 내외가 몇 년 전 외국으로 이민을 떠난 박모(78·남구 숭의동) 할아버지는 지난해 말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가 한국에 나왔다. 외국에서 자란 손자·손녀는 할아버지와 의사소통이 쉽지 않고 낯설어서인지 다가오는 것을 어색해 했다. 

박 할아버지는 "손자·손녀가 어릴 때는 옆에 와서 살을 비벼대며 품에 안겼는데, 이제는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다"면서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려우니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서운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민을 간 뒤 목소리 한 번 듣기 어렵다"라며 "떨어져 있으니 남보다 못하다"고 덧붙였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노년기에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고민하는 노년층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홀몸노인의 경우 9.5%가 외로움과 소외감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더구나 현재 홀몸노인 100만명이 넘어선 시점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로 지적된다.

한규만 한국가정 상담연구소 부소장은 "물질적 부양보다 정서적 소외가 더욱 심각한 문제"라며 "가족의 중요성이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낮을수록 노년층의 외로움과 소외감은 지속되고 결국 우울증까지 유발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 가족 의미에 대한 교육 필요

전문가들은 가족 범위 축소로 인해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젊은 부모들의 인식개선과 교육현장에서 윤리나 도덕적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함께 세대 간 의사소통을 늘리는 노력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미희 연수구 건강가정지원센터장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에서부터 개인 일을 중시하다 보니 구성원 각자 역할의 부재가 발생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의 개념이 축소되고 있다"라며 "이로 인해 가족구성원 간에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아 불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현재 교육현장에서 윤리나 도덕적인 소양을 쌓는 교육보다는 경쟁을 통해 생존할 할 수 있는 교육이 주로  되다 보니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나 인식이 약화하고 있다”라며 "아이들에게는 윤리·도덕이 강조될 수 있도록 하고, 젊은 세대에는 가족의 소중함을 알리는 다양한 인식개선교육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시대가 변화한 만큼 가족의 개념이 혈연주의적 관점이 아닌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공동체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박미희 센터장은 "최근 가족의 의미가 단순히 혈연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이웃 등 지역사회로 넓혀가고 있는 추세"라며 "가족 부양을 사회가 지원할 수 있도록 국가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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