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 문신을 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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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 문신을 한 신부님
  • 송수연
  • 승인 2020.10.13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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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인문학 산책]
②영화 《문신을 한 신부님》

문학평론가 송수연의 인문학 산책을 연재합니다. 우리시대의 다양한 문화컨텐츠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의 지혜를 배우며, 그 바닥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사진 (장면)을 보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우선 사진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신부라는 점이다.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얼핏 헛갈리는 표정은 사진 뒤에 앉은 신자들의 웃는 표정으로 미루어, 아마도 웃고 있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찬양을 드리는 것인가? 어쨌든 그는 웃고 있고 사람들도 웃거나 박수를 치고 있다. 무언가 기념할만한 좋은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 모여 축하를 하는 자리. 아무 문제도 없고,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진의 청년은 가짜 신부다. 소년원에서 막 출소한 청년이 어쩌다보니 일하러 간 마을의 신부가 된 것이다. 사실 청년은 본디 신부가 되고 싶었다. 소년원에서 만난 토마스 신부님께 신부가 되는 길을 구했으나, 전과자는 신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매우 실질적인 답을 들었다. 신부가 아니래도 소년원 출신의 전과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런데 신부라니. 폭력적인 선입견에 강고한 선긋기지만, 역시 가능하지 않다.

일자리인 목공소로 가는 길에서도 청년은 여러 번 그 사실을 확인한다. 버스에서 만난 경찰은 “너 같은 새끼는 어딜가나 촉이 와.”라고 말하고, 마을 성당에서 만난 소녀 역시 한 눈에 청년이 목공소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맞춘다. 당황한 나머지, 아니라고, 나는 신부라고 말하는 그에게 소녀는 그럼 나는 수녀라고 받아친다. 홧김에 가방 속에 있던 사제복을 보여주고 이후 어쩌다보니 청년 다니엘은 어느새 성당의 신부가 되어있다.

그런데 다니엘은 생각보다 신부의 역할을 잘 수행해낸다. 고해성사에서 감추인 진실을 상처 없이 드러나게 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미사를 집전할 때도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주민은 많지만 신자는 적은 성당, 그나마 이웃에 면을 세우러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성당에서 가짜 신부는 진짜 신부가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낸다.

그러나 우리 삶이 늘 그렇든 이런 요행은 오래가지 못한다. 가짜가 진짜에 가까워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진짜보다 더 진짜같아 지다니. 세상도, 우리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청년 다니엘이 해결되지 않는 마을의 문제를 건드리자, 그에게서 위로를 얻고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더구나 증축 기념 미사를 집전하러 간 목공소에서 소년원 동기를 만나면서 다니엘의 가짜 신부놀음은 최대 위기에 봉착한다.

 

 

나는 다니엘이 적당한 순간에 멈추기를 바랐다. 마을의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를 원했다. 최소한 소년원 동기를 발견하고 돌아온 날 쌌던 짐을 들고 도망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다. 왜 그는 그토록 마을의 문제에 열심이었을까. 진짜인 주임 신부도 덮어두었던 일을 굳이 들추고, 죽은 듯 자신의 집에 유폐된 미망인을 왜 다시 공공의 장으로 불러냈을까. 쌌던 짐을 들고 왜 달아나지 않았을까.

영화는 다니엘이 마을의 일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도, 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니엘의 마음과 선택은 영화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가 남긴 ‘진짜와 가짜’라는 화두이다. 무엇인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서품을 받은 자만이 진짜 신부인가? 물론 그것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는 그 당연한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를 여러 번 묻는다.

다니엘이 진짜 신부였다면, 그가 했던 모든 일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문제는 그가 가짜라서 생긴 것일까? 진짜는 다가갈 수 있는데 가짜는 다가갈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있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끝에서 다니엘이 그를 찾아온 토마스 신부가 만들어준 마지막 탈출구를 스스로 버리는 장면은 이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으로 읽힌다.

토마스 신부가 금지한 송별미사에 난입해 윗옷을 벗고 문신이 새겨진 자신의 몸을 만천하에 드러낸 다니엘의 모습은 그 위에 걸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성화와 정확하게 겹쳐진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우리인 것처럼, 끊임없이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우리가 또 다른 예수인 다니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셈이다. 끝나지 않는 진짜와 가짜의 싸움 속에서 과연 우리는, 나는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의심받고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것은 진짜와 가짜라는 프레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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