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진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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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진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 배성수
  • 승인 2021.10.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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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7) 화수동 다시 보기②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화도진지(花島鎭址). 1990년 11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으로 동구 화수동 138~144번지 일대에 조성된 화도진공원 안에 위치한다. 화도진지는 ‘화도진이 있던 터’라는 의미로 1989년 인천시는 화수동 138~144번지 일대에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을 재현해 놓았다. 그로부터 30년 넘도록 우리는 그곳을 아무 의심 없이 화도진이 있던 곳으로 믿어왔다. 과연 그럴까? 이제 화도진이 정말 그곳에 있었는지 합리적 의심을 제기해 본다.

 

- 피난민 정착마을에 재현된 화도진

화도진이 재현되기 전 이곳은 6.25전쟁 이후 전쟁을 피해 남하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피난민 정착촌이었다. 언덕 위까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이곳에 화도진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한미수교 100주년을 1년 앞둔 1981년이었다. 100년 전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화도진이었음을 소개하는 기사가 지역 언론은 물론 중앙지에 연이어 게재되었고, 마침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한 해로 지역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가속화되던 때였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 최초의 조약을 체결한 장소라는 점에서 화도진은 인천의 정체성을 알리는데 안성맞춤인 소재였다. 1982년 인천시는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화도 고갯마루에 화도진을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부지 규모를 20,667㎡로 정하고 무분별하게 지어진 피난민 가옥 238동을 매입하는데 24억 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토지 보상을 마치고 공사에 착수한 것이 1987년, 2년 남짓한 시간이 흘러 1989년 봄이 되어서야 화도진 복원이 마무리되었다.

 

화도진 복원 공사 조감도
화도진 복원 공사 조감도

 

화도진 복원은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이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서 화도진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도진도에 그려진 배치 형태와 건물 모습 그대로 화도진 관아를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소에 대한 고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복원에 기초가 되는 지표조사나 발굴조사가 선행되지 않은 채 공사가 추진되었다. 문화재 명칭을 ‘화도진’이 아닌 ‘화도진지’로 정한 이유이자 오늘날 우리가 이 공사를 ‘복원’이 아닌 ‘재현’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1989년 재현된 화도진 관아 (사진 출처 : 두피디아)
1989년 재현된 화도진 관아 (사진 출처 : 두피디아)

 

- 그곳은 왜 ‘화도진’이 되었을까?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는 ‘아무런 기초 조사 없이 어떤 이유에서 화도진이 있던 자리를 그곳으로 특정했는가’라는 것이다. 1894년 9월 1차 갑오개혁으로 혁파된 후, 처음으로 화도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시인이자 향토사학자였던 최성연 선생이 1959년 저술한 '개항과 양관역정'이다. 이 책에서 그는 화도진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비정했는데 마을 어르신의 구술을 토대로 화도진의 지형과 건물 배치에 대해서는 묘사하면서도 위치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한편 1973년 인천시가 발간한 인천시사는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장소를 화수동 141번지로 밝히고, 화도진 관아 건물은 동쪽 언덕 아래 30m지점에 위치한다고 기록했다. 화수동 141번지는 지금 화도진 공원이 조성된 곳이다. 1978년 3월 5일자 동아일보는 화수동 128번지 주택가에 “진(鎭) 터”라는 입간판이 서있다고 보도하였고, 1980년 인천시에서 발간한 문화재대관은 화도진지의 위치를 화수동 128번지와 163번지로 표기했다. 재현된 화도진에서 동쪽으로 20여m 언덕 아래에 지금도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화도진 공원과 화수동 163번지(지도 출처 : 네이버)
화도진 공원과 화수동 163번지(지도 출처 : 네이버)

 

1980년까지 화수동 128번지와 163번지 일대로 알려져 있던 화도진 터가 갑자기 138~144번지로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82년 한미수호조약 100주년을 맞아 인천시는 화도진 복원계획을 수립하며 그 위치를 조약 체결장소로 소개되었던 141번지를 포함한 그 주변으로 정했다. 결국 당시 화도진 복원의 목적은 화도진의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한미수호조약 100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화도진의 역사성을 살려 제대로 복원하고자 했으면, 문헌 조사와 지표 조사 등 기초적인 조사부터 거쳐야 했다. 한미수호조약 100주년을 맞아 아무런 기초 조사 없이 서둘러 복원계획부터 발표하고 그에 따라 화도진을 재현한 탓에 우리는 지금껏 아무 의심 없이 그곳을 화도진으로 믿어왔던 것이다.

 

화도진 공원에 세워진 조미수호조약 기념비
화도진 공원에 세워진 조미수호조약 기념비

 

- 그곳은 어떤 땅이었는가?

지금 화도진이 재현되어 있는 화수동 138~144번지 일대가 어떤 땅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먼저 조선총독부에서 따라 작성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확인해야 한다. 조선총독부는 한일 병합 직후인 1910년부터 8년에 걸쳐 전국의 모든 토지를 측량하고 확인하는 토지조사 사업을 추진하고 동리 별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제작했다. 화수동(당시 신화수리)의 경우 1911년 1월 20일 지주들의 신고를 마무리하고 측량을 거친 결과 87명의 지주가 310필지를 소유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 중 지금 화도진이 재현되어 있는 138~144번지의 지목은 임야(林野)와 전(田)으로 토지 소유주는 당시 경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나가이 도츄[永井道忠]였다. 그는 화수동에만 28필지 23,503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지금 화도진 공원과 화도진중학교 일대에 위치한 땅이었다.

 

화도진 관아가 재현된 공간(1912년 지적원도)
화도진 관아가 재현된 공간(1912년 지적원도)

 

화도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이라면 지목은 임야나 전이 아니라 대지(垈地)로 표기되어 있어야 한다. 지목은 토지의 사용목적에 따라 종류를 구분해 놓은 것이고, 대지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말하기 때문이다. 1912년 토지조사부에 임야와 전으로 표기되어 있다면 그곳은 당시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경작지이거나 숲이 우거진 야산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화도진 혁파 후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 사이 관아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밭으로 경작되거나 야산으로 남겨졌을 수도 있다. 1894년 화도진이 혁파되면서 관할 토지는 모두 전환국(典圜局)에서 관리하다가 1905년부터 궁내부 경리원(經理院)으로 관리 주체가 변경되었다. 화도진이 관할했던 토지는 관아를 포함하여 운영비를 충당하던 둔토(屯土)와 임야 등이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 상 화수동 138~144번지 일대는 화도진에 속한 땅이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여기에 화도진 관아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 그렇다면 화도진은 어디에 있었나?

지금 화도진 관아가 재현되어 있는 그곳이 화도진 터가 아니라면 화도진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우선 화도진 재현에 기초가 되었던 화도진도에 표시된 지형과 도로망으로 그 위치를 추정해보자. 화도진도는 삼각측량에 기초한 근대식 지도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축적법을 이용해 제작된 대동여지도 이후에 발간한 지도이기에 당시의 지형과 도로망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하였다. 화도진도에서 화도진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 북쪽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문인 외삼문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은 세 갈래 길로 각각 화도고개, 묘도, 수문통으로 이어진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이 길들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세 갈래 길이 모였던 외삼문의 위치는 화수동 242번지 일대가 된다. 그 뒤편으로 화도진의 관아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화도진도(1879), 인천부지도(1918), 네이버 지도에서 확인되는 화수동 도로망과 화도진 삼문의 위치 (화살표 표시가 화도진 외삼문이 있던 곳)
화도진도(1879), 인천부지도(1918), 네이버 지도에서 확인되는 화수동 도로망과 화도진 삼문의 위치 (화살표 표시가 화도진 외삼문이 있던 곳)
화도진 외삼문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화수동 242번지 건물
화도진 외삼문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화수동 242번지 건물

 

화도진의 위치를 추정하는 또 한 가지 단서는 최성연 선생이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인용한 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 조지 헤버 존스(G.H.Jones)의 기고문이다. 존스 목사는 1901년 호머 헐버트(H.B.Huibert) 박사가 만든 월간 영문잡지 Korea Review 창간호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화도진 폐쇄 이후 그 언덕은 지금 작은 집과 큰 저택으로 빽빽이 뒤덮여서 겨우 보행을 할 수 있는 골목길이 얼기설기 엉켜있을 뿐 갑작스레 오고 또 가버린 커다란 변화를 더듬어 볼만한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Korea Review 창간호 (화도진도서관 소장)
Korea Review 창간호 (화도진도서관 소장)

 

존스 목사는 1892년 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03년 서울로 이임할 때까지 10여 년 간을 인천에 머물며 기독교 선교와 조선인 교육에 힘썼던 인물이다. 이 기고문은 그가 인천에 머물 당시인 1901년에 쓴 것으로 화도진 혁파 후 불과 7년 만에 화도진 관아가 있던 언덕은 이미 크고 작은 집들로 빽빽이 채워졌음을 알 수 있다.

다시 1912년 신화수리의 지적원도를 살펴보자. 지도에 표시된 붉은 점선이 화도진으로 연결되는 세 갈래 도로망이고, 붉은 점이 외삼문의 위치다. 그리고 푸른색 영역으로 표시된 곳이 화도진 관아가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여기에는 1980년 문화재대관에서 화도진 터로 비정한 128번지와 163번지도 위치한다. 존스 목사가 기고문을 작성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기에 집들이 더욱 많이 들어섰을 것이고 대지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그 좌측 임야와 전으로 구성된 넓은 필지가 지금 화도진이 재현된 공간이다.

 

화도진 관아 추정지 (1912년 지적원도)
화도진 관아 추정지 (1912년 지적원도)

 

화도진도에 그려진 지형과 도로망을 토대로 자료에 등장하는 화도진 관련 내용을 끼워 맞춰 화도진의 위치를 추정해 보았다. 어느 정도 확실해 진 것은 화도진 관아가 재현된 화도진 공원은 조미수호조약 100주년을 기념해 서둘러 조성된 곳으로 화도진 터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조미수호조약 체결지가 이곳이 아닌 자유공원 중턱으로 확인되었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화도진 정문의 위치는 화수동 242번지이고 그 뒤편 주택가를 화도진 관아가 있던 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어서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현장에서의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이미 주택가로 조성되어 있지만, 아직 그 아래로 화도진의 유구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화수동 일대의 재개발이 추진될 예정이라 하니 그때라도 발굴조사를 통해 화도진의 흔적을 찾아내고 관아 위치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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