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론의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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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론의 돼지
  • 최원영
  • 승인 2021.10.25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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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23화

 

 

지난주 글에서 우리는 ‘어느 부인이 더 맛있는 케이크를 구웠겠는가?’라는 제목으로, 삶을 결정하는 두 가지 속성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는 타고난 재능이지만 이 재능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을 성공적이거나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만은 않는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재능은 삶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절반은 바로 지금 이 순간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에 따라 성공과 행복이 결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재능’에 속하지만, 이것만으로 성공하거나 행복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노래를 잘하는 재능을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느냐, 즉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인 또 하나의 ‘절반’까지도 갖추고 있어야 성공과 행복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방송이 하나의 절반인 ‘지식’과 또 하나의 절반인 ‘지혜’를 구분하고, 이 두 개를 모두 갖출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대부분 사람이 지식인입니다. 똑똑합니다.

지식인은 논리에 강합니다. 논리적이란 말은 결론을 끌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지식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이니까요. 그런데 왠지 불편한 마음만큼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 불편한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철학아, 내 고민 좀 풀어줘》(황상규)에서 저자는 ‘피론의 돼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피론은 여행 중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 사람들은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자 두려워 허둥지둥했다. 자신도 방법을 찾지 못한 피론은 그 와중에서도 유일하게 평정심을 잃지 않고 평화롭게 잠자고 있는 존재를 발견했다. 바로 돼지다.

이런 사실을 통해 그는 지식이 인간을 고문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반문한다.

‘인간에게 이성이 있는 것은 우리를 고문하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되어, 오히려 그것을 얻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평정과 안식을 잃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이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더 열악하게 만든다면, 지식이란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지식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논리’에는 ‘감성’이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지식인의 논리적인 말을 따라가다 보면 금방 지칩니다.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도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에 감성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식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앎은 고스란히 우리의 뇌에 기억됩니다. 그렇게 기억된 앎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 차원에서만 머물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지식’이란 말을 시계추의 한쪽 끝에 두면, 다른 쪽 끝에는 ‘지혜’가 있을 겁니다. 지식이 지식으로만 머물러 지혜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삶은 고장 난 시계추가 되고 맙니다.

지식에서 지혜로, 지혜에서 지식으로 끊임없이 오고 가야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시계추처럼 말입니다.

지식이 ‘머리’에 머물고 있다면, 지혜는 ‘마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식은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라면, 지혜는 ‘행위’를 통해 전달됩니다.

지식은 ‘진실’을 숨길 수 있지만, 지혜는 ‘진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더욱더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의 논리가 대중의 판단을 흐리게 해 혼란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을 부추기지만, 지혜는 ‘겸손’을 지향합니다.

지식은 ‘말’을 많이 하게 하지만, 지혜는 ‘경청’하게 합니다.

지식은 ‘옳고 그름’으로 나누려 하지만, 지혜는 ‘기쁨과 슬픔’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지식인은 스스로 오르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에 의해 올려집니다.

지식인들이 모인 곳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다툼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기쁨을 서로 나누고, 슬픔을 겪는 이들의 처지를 공감하며 함께 눈물짓습니다. 그리고 아파하는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용히 행동합니다.

시계추는 좌우로 오갑니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상반된 것들이 있습니다. 상반된 그것 사이를 오가며 사는 것이 ‘삶’입니다. 이것을 삶의 ‘운동성’이라고 부릅니다.

지식과 지혜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는 늙어갈 겁니다. 교만했다가도 그 교만을 깨닫고 겸손함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살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다시 교만한 태도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가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거니까요. 다만 우리가 지금 시계추의 어느 쪽에 머무는지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반대 방향으로 되돌릴 지혜를 우리는 이미 갖고 있으니까요.

이 지혜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피론의 돼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함과 안식 속에서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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