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걸었어도 깨닫지 못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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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를 걸었어도 깨닫지 못하는 까닭
  • 최종규
  • 승인 2011.07.01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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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서영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걷는 길은 하나가 아닙니다. 곧게 뻗은 한길이더라도, 이 곧게 뻗은 한길을 걷는 사람은 다 다른 모양새와 생각과 느낌입니다. 누군가는 앞만 바라보며 걸을 테고, 누군가는 옆을 두리번거리며 걸을 테며, 누군가는 자꾸자꾸 멈출 테지요. 곧게 뻗은 한길이더라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걷기 때문에 다 다른 생각과 이야기와 느낌이 태어납니다.

 산티아고라 하는 데를 걷는 길 또한, ‘걷는 길은 같다’지만, 이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 길을 걸은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르게 느끼거나 품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마련입니다.

 서영은 님이 내놓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문학동네,2010)라는 책은, 산티아고를 걸었기 때문에 뜻있지 않습니다. 산티아고를 걸었대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네 골목을 걷든, 아파트 골마루를 걷든, 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느끼려 할 때에 느낌이 태어납니다.

.. 대한민국의 중요한 문학상 심사를 거의 도맡아 해온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이 나에게, 내가 그동안 심사를 너무 많이 해온 것을 깨우쳐 주었다. 폭식 … 그 순간 나는 작가로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너무 멀리 떠나 와 있는 것을 느꼈다 … 나는 문학을 시작할 때 내 문학이 있을 자리는, 그 낡은 구두, 제 몸을 아무리 부딪혀도 삶이 양지로 변하지 않는, 또는 끝내 양지 쪽으로 자리를 옮길 수 없는 비통한 증거로서, 다 해진 그 구두가 있는 자리라 여겼다 ..  (15, 16, 17쪽)

 서영은 님은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라는 책에서 ‘내려놓기’를 꿈꾼다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줍니다. 그렇지만, 막상 서영은 님 스스로 내려놓기를 했다고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내려놓기를 하겠다’는 생각만 잔뜩 드러날 뿐입니다.

 참으로 내려놓기를 할 마음이라면, 굳이 ‘무엇을 내려놓아야지’ 하는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내려놓았을 테니까요. 제대로 내려놓지 않았을 뿐더러, 아직 내려놓을 마음이 없는데다가, 어쩌면 내려놓지 않은 채 마지막 삶길까지 걸을 매무새인 터라 ‘내려놓지 못하는 내려놓기’ 이야기가 가득하지 않나 싶습니다.

 문학상이든 작가이든 김동리이든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교수이든 강사이든 가정주부이든 짝짓기 연인이든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나 스스로 즐거울 삶을 찾아 나 스스로 즐거울 길을 걸으면 됩니다. 문학상 심사를 즐겁고 아름다이 받아들여 옳고 바르게 펼치면 됩니다. 문학상 심사를 안 한대서 더 훌륭하거나 많이 한대서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잘 팔리는 소설을 써서 상도 받고 글삯도 벌어야 좋다 할 만하지 않습니다. 소설꾼 김동리 님하고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건 없건 나한테 따사로운 사람이거나 나한테 커다란 사람이거나 나한테 애틋한 사람이거나 나한테 좋은 사람이면 넉넉합니다.

 마음이 여리기 때문에 믿음을 품는다 하고, 마음 깊이 살가이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믿음을 붙잡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단단하기 때문에 믿음을 품기도 하며, 마음 깊이 넉넉히 맞아들이기 때문에 믿음을 붙잡기도 합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어떻게 일구려 하느냐가 대수롭고, 내 길을 내 발로 어떻게 디디려 하는가가 대단합니다. 돈없는 삶도 내 삶이고 돈있는 삶도 내 삶이에요. 가난하대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 않고, 가멸차대서 하늘나라에 갈 수 없지 않아요. 어떠한 길을 걸어가며 어떠한 삶을 일구든, 내가 나를 바라보며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매무새이면 알뜰합니다.

.. 내 마음에서는 김동리와의 인연을 다 내려놓고 싶은데, 밖에서는 끊임없이 그의 사진이 필요하다, 육필원고가 필요하다, 작가의 방을 꾸미겠다 등등의 일로 전화가 걸려왔다 … 내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과 비례해서, 내 마음의 여유는 폭우에 깎이는 산의 절개지처럼 세상 속으로 쓸리어 나갔다. 얄팍하고 거짓된 칭찬, 집단심리에 편승한 일시적 관심인 줄 알면서도 나는 높고 낮은 강단에 올라, 독자들의 값싼 호기심에 부응하려고 애썼다 ..  (21, 30쪽)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는 여행책도 믿음책도 수필책도 아닙니다. 딱히 어느 한 갈래로 넣을 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돋보이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어냐 하면, 함께 산티아고를 걷는 길동무한테 끝없이 투정을 부리는 대목. 길동무 마음을 살뜰히 읽지 않으며 그예 울타리만 쌓는 대목.

.. “너무 오래 쉬면 일어나기 싫어져요.” 노련한 카미노답게 치타는 앉지도 않고, 사진만 몇 컷 찍은 다음 이내 다시 떠날 채비를 했다. ‘좋은 경치를 봐도 그냥 스쳐만 간다면, 도대체 이 길은 왜 있는 거야.’ 속으로 투덜대며, 마지못해 떠날 채비를 한다 … 그녀는 제법 많은 굴을 따서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비탈을 낑낑거리고 올라왔다. 몸이 추억을 되찾아가는 방법은 그 몸에 기억된 수고를 재현하는 것일까. 비탈 위에서 치타의 손을 잡아끌면서 나는 그녀가 단순히 먹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관계된 향수를 되찾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  (98, 190쪽)

 서영은 님은 스스로 이토록 낮아지고 싶어 글을 쓰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이토록 낮아지자 다짐하면서 글을 썼는지 모릅니다. 곁에서 사랑을 나누며 내미는 손길을 얼마나 못 받아들이며 얼마나 못 헤아리는가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 이제부터는 참사랑과 참믿음을 찾아나서겠다는 다짐을 펼치려는지 모릅니다.

 ‘좋은 경치’는 ‘한 번 보았으니 됐’습니다. 왜냐하면, 길동무이든 서영은 님이든 ‘좋은 경치’가 있는 곳에서 뿌리를 박으며 살아갈 사람이 아니니까요. ‘좋은 경치’를 보자면서 ‘산티아고 걷기’를 하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좋은 경치’를 보려는 산티아고 걷기가 아니라, ‘내 마음을 착하게 다스리면서 참다운 삶을 바라보는 고운 넋을 일구려는’ 뜻에서 하려는 산티아고 걷기입니다. 서영은 님 스스로도 밝히고, 이제껏 산티아고를 걸었다는 사람들 또한 밝히는 대목이에요.

 좋은 경치를 보자면 한낱 관광객 아니겠어요. 좋은 경치에 얽매이자면, 한국땅에서 문학상 심사 오래오래 맡고 대학교수 이름쪽 단단히 거머쥐면 됩니다. 좋은 경치 아닌 좋은 삶을 일굴 노릇이고, 좋은 이름값 아닌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자며 마음닦이를 하듯 걷는 산티아고 ‘노란 화살표 길’이라고 느낍니다.

 먼 길을 오래도록 걷는 내내 곁에서 이모저모 챙기고 밥을 차리며 도움말을 끝없이 들려주는 길동무 마음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으면서 산티아고를 걸었다면, 이 산티아고 걷기란 무슨 보람인가 알쏭달쏭합니다.

.. 도시에 들어서면 순례자들은 이방인이 된다. 도시가 버린 것은 ‘걷기’이다 … 여기까지 오는 길이 고통스러웠으니 산티아고가 거룩하고 성스럽기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일 수 있다 ..  (108, 365쪽)

 에스파냐 도시이든 칠레 도시이든 일본 도시이든 한국 도시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도시이든 사람들이 걷도록 놓아주지 않습니다. 어느 도시이든 자동차가 우쭐거립니다. 어느 도시이든 높직한 건물이 가로막습니다. 어느 도시이든 따스한 사람결보다 돈을 앞세웁니다. 어느 도시이든 풀과 나무와 흙이 아닌 시멘트와 아스팔트입니다.

 이러한 도시 얼거리를 일찍부터 알았다면, 서영은 님은 일찌감치 도시를 떠날 노릇입니다. 꼭 산티아고를 걷지 않았어도 슬기롭게 깨달아 아름다이 살아갈 노릇입니다.

 산티아고는 거룩하지 않으니까요. 산티아고는 산티아고이지 서울이나 제주가 아니에요. 산티아고에서는 산티아고를 온몸으로 부대껴서 온마음으로 느껴야 해요. 내가 살아온 대로 보고 느끼며 받아들이는 이야기인 줄을 깨달아야 해요.

 이제 책을 덮습니다. 외롭다고 생각하며 외롭다는 이야기를 첫 쪽부터 끝 쪽까지 수없이 되풀이하는(그렇다고 ‘외로움’이라는 낱말로 외롭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일기책은 덮습니다.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살아가더라도 외롭다고 느낄 수 있고, 사람들한테 둘러싸였으나 내 마음 차분하게 사랑할 길을 찾지 못하기에 외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디, 산티아고에서 한국땅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자리에서 외로움을 떨치거나 예쁘게 껴안으면서 참살길을 보살펴 주기를 바랍니다.

―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서영은 글·사진,문학동네 펴냄,2010.4.8./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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