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뒷날, 아이가 어른이 될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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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뒷날, 아이가 어른이 될 무렵
  • 최종규
  • 승인 2011.08.1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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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이진희,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

- 책이름 :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
- 글 : 이진희
- 옮긴이 : 이규수
- 펴낸곳 : 삼인 (2003.9.20.)
- 책값 : 15000원

 (1) 아이와 살아가는 하루

 아이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짧으면서 깁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집일을 도맡으면서 아이하고 부대끼다 보면, 하루란 참 금세 기웁니다. 이 하루 내내 지치지 않고 뛰놀고파 하는 아이랑 부대끼는 만큼, 하루란 참 길디깁니다.

 새벽 다섯 시에 잠에서 깨든, 아침 열 시에 잠에서 깨든, 아이는 언제나 잠에서 깬 때부터 놀자고 조잘조잘댑니다. 네 살 아이는 아직 시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수 있겠지요. 눈을 번쩍 떴으니 다시 잠들기 힘들어 이러할 수 있겠지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 아이랑 복닥이면서 아침을 보내며 둘째 오줌기저귀를 빨고 옆지기 미역국을 끓이고 난 다음, 밥을 하느라 미처 헹구지 못한 빨래를 마저 하고, 이동안 새로 나온 빨래를 더 한 다음 설거지를 하고 방바닥을 비질합니다. 몇 시쯤 되었을까 헤아리지만 시계를 들여다볼 겨를 없이 몰아치다가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때는 열두 시 이십 분. 이제 더는 버티기 힘들어 첫째 아이가 이렇게 떠들건 저렇게 안기건 아랑곳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둘째 갓난쟁이 옆에 털푸덕 눕습니다. 첫째는 어느새 아버지 곁으로 달라붙으며 조잘조잘댑니다. 그림책 하나 읽고 싶기도 하지만, 이럴 기운이 없습니다. 끄응 하고 일어나서 아이 이불을 바닥에 펼친 뒤 아이한테 여기에 누우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얌전히 눕습니다. 틀림없이 졸립기 때문입니다. 새벽 일찍 깨어 논 뒤 밥을 먹을 때부터 졸린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살살 부채질을 하며 아버지는 까무룩 잠이 듭니다. 얼마쯤 지난 뒤인지 모르겠는데 문득 눈을 뜨니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잠들었습니다. 부채를 살살 흔듭니다. 땀 맺힌 이마를 쓸어넘깁니다. 한동안 이렇게 부채질을 살살 하면서 부디 깊이 낮잠을 자라고 마음속으로 빕니다.


.. 해방 후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에 잔류하게 된 데는 남한 정국이 불안했다는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귀국자 한 사람에게 1천 엔의 지참금만을 허용한다는 비인도적인 처우가 더욱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 돈으로는 부산에 내려 당장 숙식을 해결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 (일본 정부로) 몰수된 조선인연맹 학교의 재산은 일본 전국적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점령군을 방패 삼아 이런 조치를 강행하였지만, 결과는 오히려 재일조선인의 반미·반일 감정을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 일본이 낙랑 유적에 그토록 고집한 것은 한나라의 침략에 의해 토착 사회가 발전했다는 궤변이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 지배 논리를 합리화하는 데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 조선고등학교에서는 2학년이 되면 반드시 자포자기하는 아이들이 생기곤 했다. 성실하게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취직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들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은 부모 세대 재일교포들의 쓰라린 역사를 모를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미래 또한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  (17, 24, 90, 110쪽)


 팔월에 태어난 첫째는 두 달 뒤에 석 돌을 채웁니다. 석 돌을 채우면 이때부터 다섯 살로 차근차근 나아가는 셈입니다. 아이하고 살아온 나날은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때부터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머니 뱃속에 조그마한 목숨씨로 깃들 때부터라고 느낍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조그마한 목숨씨로 새근새근 잠들던 나날부터 우리 집은 세 식구였고, 둘째를 바라볼 때에도 똑같습니다.

 첫째가 벌써 이만큼 컸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동안 얼마나 복닥였는데 이렇게 자라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지켜보면 ‘아이가 얼마나 크는가’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날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지켜보기 때문에 ‘아이가 날마다 얼마나 씩씩하게 새로 거듭나면서 크는가’를 환하게 느낍니다. 어제 아이를 안고 오늘 아이를 안을 때에 느낌이 다릅니다. 아이 머리를 감길 때에 고개를 숙이라 하면서 감길 수 있으나 부러 무릎에 누여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감깁니다. 이렇게 머리를 감기노라면 아이 키가 어느 만큼 컸고, 아이 몸무게가 어느 만큼 늘었는지 몸으로 깨닫습니다. 이제 첫째는 머리를 받치지 않아도 스스로 머리를 잘 가누어, 머리감기기 할 때에 그닥 힘들지 않아요. 몸무게가 꽤 나가서 버거울 뿐입니다.

 둘째 기저귀를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널 때면, 첫째는 부리나케 좇아나옵니다. 통에 든 빨래집게를 제가 꺼내어 건네겠다고 나섭니다. 아버지는 기저귀만 빨랫줄에 걸치고는 기다립니다. 아이는 한손에 하나씩 쥐고는 “자!” 하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응.” 하고 대꾸하거나 “네, 고맙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똑같은 빛깔인 빨래집게를 들고 오기도 하다가는, 다른 빛깔인 빨래집게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한손에 하나씩 쥔 채 딱딱 벌렸다 오므렸다 놀면서 가지고 옵니다.

 사진을 찍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요즈막에는 기저귀를 널며 목에 사진기를 겁니다. 아이가 빨래집게를 들고 달려올 때에 얼른 사진기를 쥐어 찰칵 하고 찍습니다.

 집에서 첫째가 둘째를 귀여워 하는 모습을 보면 잽싸게 사진기를 쥐어들어 찰칵 하고 찍습니다. 심심해 하며 홀로 책을 펼쳐 읽는다든지, 둘째 겉싸개를 뒤집어쓰고 논다든지, 아버지는 넌지시 알아채어 살그머니 사진으로 담습니다.


.. (한국전쟁) 뉴스 필름은 B-29 폭격기가 도시와 민가에 화염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을 생생히 전해 주었고, 보기만 해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처음으로 제트 전투기가 등장하고 바주카포가 북한 탱크를 파괴하는 데 뛰어난 화력을 발휘한 것도 그무렵이었다. 나는 민간인을 포함한 대량 살육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름에서는 미군이 북한군을 섬멸하고 있다고 설명하였지만, 공중 폭격으로 파괴된 것은 평양과 신의주 등 도시만이 아니었다. 북한 탱크가 숨겨져 있다며 한국(남녘)의 초가 농가에도 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었다 … 1950년부터 4년 동안의 일본의 전쟁 특수 경기는 24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1957년까지는 45억 달러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은 메이지 이후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 중국 침략으로 시작된 아시아 여러 국가에 대한 전쟁 책임을 애매하게 한 채 미국의 반공 정책에 가담함으로써 경제 부흥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미군은 처음으로 제트 전투기를 투입하였고, 최신 살인 병기의 성능을 확인하는 실험장으로 삼았다 … 1965년 말에 베트남에 파견된 미군은 18만 명에 달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잃으면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차례로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동맹국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부패 정권이라도 반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 지원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변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요청’에 부응하여 한국군 파견을 강행하였다. 파병 군인은 1973년까지 연 40만 명에 이르렀고, ‘베트남 특수’로 사회 전체가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 희생을 부른 해외 전쟁에 군대를 보내 타민족을 무력으로 억압했다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우리 역사에 남겼다 ..  (39∼40, 63, 131쪽)


 사진을 찍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사진을 보노라면 첫째가 처음 태어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가를 읽을 만합니다. 날마다 한 장만 찍었다 하더라도 석 돌까지 천 장을 찍는 셈이라 하겠으나, 첫째 아이 사진은 날마다 서른 장 남짓 찍었으니까, 석 돌이 된다면 삼만 장을 넘겠지요.

 사진을 찍는 아버지로서, 그동안 아이를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사진을 보며 지난 삶을 가만히 되새길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으로만 모든 이야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와 사진을 찍고 난 다음, 사진을 찍을 때까지, 사진에 찍히지 않은 하루, ……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이야기는 숱하게 많습니다.

 글을 쓰는 아버지로서 곰곰이 돌이켜봅니다. 아이하고 보내는 나날을 글로 날마다 신나게 적바림한달지라도, 아이하고 보내는 모든 이야기를 글로 옮기지 못합니다.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아이가 뒷날 어른이 될 무렵, 아이가 보낸 갓난쟁이일 때하고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이런 어린 나날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며 들려주어야 좋을까 곱씹습니다. 아이한테는 무슨 이야기가 도움이 되거나 쓸모가 있거나 기쁨이 되거나 웃음꽃이나 눈물나무가 될는지 헤아립니다.


.. 선명하게 남은 손목 안쪽의 상처를 보자 마음이 얼어붙었다. 북한이 내건 ‘주체 사상’은 평등과 인간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혁명 동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전화 도청 사건’과 이종수 사건에서처럼 민족교육에 대한 꿈이나 이상과는 달리 비열한 방법으로 동료에게 ‘적’의 딱지를 붙이려고 획책하였다 … 남한 출신의 이종수가 북한을 지지하고 김일성이 내건 사회주의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따뜻한 사회,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로운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으로 ‘추방’된 그는 10여 년 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이에도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었다 … 마오쩌둥의 서거를 알고 나서 위대한 지도자도 독재자도 언젠가는 죽고 만다는 감회에 잠겼다. 슬픔보다는 오히려 안도의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1966년에 그의 주도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10년간에 걸쳐 류사오치와 펑더화이 등 노혁명가를 비롯해 많은 지식인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 마오쩌둥이 고난의 투쟁을 통해 중국 민중을 제국주의자로부터 해방시킨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권력의 자리에 앉고 나서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똑같이 과거의 혁명 동지를 숙청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조차 짓밟아 버렸다 ..  (165∼166, 229쪽)


 날짜와 시간에 따라, 이날 이때에는 무얼 했다고 적으면 좋을까요. 아이가 읊는 말을 모두 적을까요. 날마다 사진 한 장에 글 하나를 붙이면 좋을까요. 어버이가 바라보는 아이일 때하고, 아이가 바라보는 어버이일 때에는, 삶이 얼마나 달라 보일까요.

 아이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 온누리에 무슨 일이 터졌는가를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 그러모으면 뜻이 있으려나요. 뒷날 아이 스스로 읽을 만한 좋다 싶은 책을 차근차근 갈무리하면 기쁘려나요.

 한 시 무렵에 잠든 듯한 아이가 일어나면, 쉬를 한 번 누이고 옷을 챙겨 입혀, 금왕읍 장마당에 다녀올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아버지는 예순터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낑낑거려야 하겠지요. 긴 장마 사이 살짝 비가 멎은 오늘 하루, 푸성귀를 장만하려고 바지런히 마실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수레에 탄 채 길을 나서면 수레에서 종알종알 떠들거나 노래를 합니다. 음성읍으로 갈 때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적어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금왕읍으로 갈 때에는 오가는 자동차가 많아 “빠방이가 시끄러워!” 하고 빽 외칩니다.

 아이는 늘 느끼는 그대로 몸으로 드러내어 살아갑니다. 아이 못지않게 어버이 또한 언제나 느끼는 그대로 몸으로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좋은 바람을 쐬고 좋은 햇볕을 맞으면 좋은 하루라 여기며 고맙게 살고, 후덥지근한 바람을 안고 찌뿌둥한 하늘을 바라보면 고단한 하루라 헤아리며 고맙게 삽니다. 어느 하루 고맙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어느 하루 반갑지 않은 날이 없어요.


.. 국경선상에 멈춰선 지 10여 분. 여러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강폭은 200미터에 불과하고 상류로 올라가면서 더욱 좁아진다. 국경은 간단히 건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계로 언어와 풍습, 습관이 완전히 다른 민족이 존재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영토가 대륙에 이어져 있는 한반도가 민족으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굴욕의 역사는 이를 덮음으로써 자국의 긍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교훈으로서 냉정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 국가와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역사 교육이야말로 인류의 미래에 기대를 거는 교육이 아닌가! ..  (313, 321, 325쪽)


 바야흐로 석 돌을 꽉 채울 첫째는 이제 빨래 개는 솜씨가 많이 늘었습니다. 빨래 개기는 두 돌이 채 안 되었을 때부터 시늉으로 했지만, 엊그제부터 곁에서 아버지가 거들지 않아도 퍽 말끔히 갭니다. 몇 달 앞서부터 혼자서 옷을 벗고 입고 잘 해냅니다. 이 옷 입었다가 벗고 저 옷 입었다가 벗고 하는 놀이를 꽤나 즐깁니다. 처음 단추꿰기를 해내던 날에는 하루 내내 온갖 옷에 붙은 단추를 꿰다가 풀다가 하며 놀았어요. 아이 손은 하루가 다르게 야물어지고, 아이 몸은 하루가 새롭게 튼튼해집니다. 아이 눈은 하루가 다르게 빛날 테며, 아이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거나 넓어지겠지요.

 이 아이가 어린이집이라든지 유아원이라든지 유치원 같은 데에 다녔다면, 아이는 꽤 어린 나이인데에도 뭔가를 알거나 깨치거나 누리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대끼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목숨과 삶을 느끼면서 어버이가 누리는 목숨과 삶을 아이한테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어버이가 밥상 앞에 앉는 매무새대로 아이도 밥상 앞에 앉습니다. 어버이가 빨래를 어떻게 하고 청소를 어찌하느냐에 따라 아이도 이러한 집일을 익힙니다. 어버이가 자가용을 모는지 두 다리로 걷는지 자전거를 타는지에 따라, 아이가 앞으로 즐길 탈거리가 달라집니다.

 어버이가 텃밭을 일구면서 푸성귀를 거두면, 아이는 일찍부터 텃밭 호미질에 익숙합니다. 어버이가 꽃밭을 가꾸면서 푸나무를 돌보면, 아이는 어린 날부터 꽃밭 푸나무를 아낄 줄 압니다.

 (2) 내가 사랑하는 하루

 《해협, 한 재일사학자의 반평생》(삼인,2003)을 읽습니다. 재일사학자인 이진희 님은 당신 아이한테 당신이 살아온 나날을 들려주려고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한겨레붙이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 삶이 어떠한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어디에서든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며 이러한 책을 썼겠구나 싶습니다.

 《해협》은 역사책이나 기록이라는 테두리에서 쓴 책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를 사랑하는 손길로 어루만지는 어버이 마음으로 쓴 책입니다. 이런 역사를 알거나 저런 발자국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절주절 읊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는 동안 너희 어버이는 어떠한 살림을 꾸리며 어떠한 생각을 품었고, 저런 일을 겪는 동안 너희 어버이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길을 걸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옳은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며 옳은 길을 걸었든, 젊을 적에는 옳은 줄 알았으나 나중에 돌아보니 철없이 잘못 길을 걸었든, 스스럼없이 하나하나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잘 한 일만 보여주려는 이야가기 아닙니다. 기쁜 일만 드러내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웃은 일과 운 일, 기쁜 일과 슬픈 일, 벅찬 일과 아픈 일을 골고루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삶에는 눈물과 함께 웃음이 있고, 웃음과 함께 눈물이 있거든요. 삶에는 오르막과 함께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과 함께 오르막이 있거든요.


..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친구들 사이에서는 영어를 배워 미국을 잘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높았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미 군정청이 일제의 앞잡이였던 관료와 경찰관을 일제 때보다 더 높은 자리에 등용함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 훗날 안 일이지만 조선고등학교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두 명의 형사가 시골집에 들이닥쳐 나에 관한 모든 물건들을 압수해 갔다. 아버지는 ‘좌익’에 물든 아들 문제로 치안 당국에 자주 출두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에는 ‘연좌법’ 때문에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동생도 감시는 물론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당국의 방해 공작은 계속 이어져 시골집 논밭만이 아니라 조상 전래의 가옥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26년이나 지난 1981년 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였다 … 한국에서는 1978년 6월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노려 관변 단체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쥔 박정희는 ‘개발 독재’를 보다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정치가뿐만 아니라 학생과 지식인의 저항도 날로 높아졌다 … 메이지 정부는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과 사할린 남부를 빼앗고, 동청철도와 다롄, 뤼순의 조차권 등을 획득했다. 일본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구미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또 수많은 ‘영웅’과 ‘전쟁 미담’을 만들어 ‘일본의 긍지’를 널리 선전하기도 했다 … 부상자의 전후는 참혹하여 ‘폐병(廢兵)’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더욱이 “가혹한 세금이 호랑이와 같다”고 할 정도로 무거운 세금이 국민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러일전쟁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민중의 목소리는 압살되고 말았다.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군비 확장에 매달렸다 ..  (13, 85∼86, 243, 323∼324쪽)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면 땀을 몇 바가지 쏟습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얼굴이 벌개집니다. 아이는 자전거수레에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곯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오르막은 길디길다고 느끼고, 내리막은 짧디짧다고 느낍니다. 이 긴 언덕을 오르고 나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내리막은 참으로 짧구나 싶지만, 이렇게 바람을 쐬면서 길디긴 언덕을 오르며 쏟은 땀을 모두 씻거나 텁니다.

 앞으로 낑낑거리며 자전거를 달리는 동안 생각합니다. 수레에 앉은 아이 눈높이에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보이고, 시골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어떻게 보일까 하고.

 수레에 탄 아이는 자동차가 곁을 스치고 달릴 때에 “빠방이 시끄러워!”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자동차 소리는 시끄럽다고 느끼지만, 수레에 앉는 나즈막한 높이에서 헤아리자면 훨씬 무서우면서 시끄럽겠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모는 이들은 이러한 줄을 모르겠지요. 생각을 안 하겠지요. 언덕을 낑낑거리며 오르느라 손잡이나 몸에 힘이 빠져 비틀비틀 할 때에 뒤에서 빵빵거리지 않고 빠르기를 줄이면서 옆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달리는 자동차는 그리 안 많습니다. 열 대가 지나가면 여섯 대는 아슬아슬하게 붙으며 씽 하고 바람을 일으킵니다. 때로는 시끄럽게 빵빵 울리고 지나가기까지 합니다. 도심지에서라면 모르되, 시골길에서 규정속도를 훨씬 넘기며 달리는 자동차들이 아이를 태운 자전거수레한테 살가이 마음을 쓰기란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들 자동차에 아이를 태웠다면? 아이를 자동차에 태워 달리면서 아이를 수레에 태운 자전거를 바라볼 때에도 아슬아슬 무시무시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도 좋을까 궁금합니다.

 일본에서 나온 만화나 영화를 보면 중·고등학교 여학생이 짧은치마를 입고도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아주 흔히 자주 봅니다. 일본에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고 데려오는 모습을 만화나 영화로 살피면 으레 자전거에 아기걸상을 마련해서 태우고 다니기 마련입니다.

 한국에서도 장바구니에 먹을거리를 잔뜩 싣고 앞뒤로 아이를 하나씩 태운 채 다니는 아주머니를 가끔 보곤 합니다. 그렇지만, 가끔 볼 뿐, 으레 어디에서나 보지는 못합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기는 어버이 가운데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서 맡긴 다음, 자전거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요. 이 나라 아이들은 갓난쟁이일 때부터 ‘자동차 타기’에 길들거나 익숙한 삶이 된다고 느낍니다.


.. 이해에 읽은 몇몇 책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와나미쇼텐이 간행한 하타다 타카시의 《조선사》는 그 중 한 권이다. 바로 전 해인 1951년에 출판됐는데 내가 읽기 시작한 것은 신학기가 시작된 4월인가 5월부터였다. 아오야마 교수가 강의에서 소개하여 곧바로 구입하여 자세히 읽었다. 조선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된 것은 한국에 대한 하타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 공부한 것을 고토 교수 앞에서 피력했지만 단지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내용은 부실했다. 말뿐인 ‘진보적 해석’에 대해 고토 교수는 ‘주관적인 생각만으로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냉정히 비판하였다 …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우리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극심한 지배를 받고 있던 1922년이었다. 해방 전에 이처럼 용기 있는 학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나는 8·15 해방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었다 … 마음이 깨끗해지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일본의 지식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야나기의 맑은 눈과 깊은 사상에 감동한 것이다. 나는 야나기를 생각하면서 (석굴암) 동굴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본존불의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상 앞에 섰을 때 그만 두 다리가 멈춰 버렸다. 풍만한 육체에 얇은 천의를 걸친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자비에 가득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한국을 이해하는 하타다와 같은 일본 지식인이 스무 명만 있었다면 일본인의 한국관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  (55, 62, 75∼76, 278, 297쪽)


 《해협》을 쓴 재일사학자 이진희 님은 어떤 삶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해협》을 쓴 재일사학자 이진희 님이 낳아 함께 살아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된 다음에는 저마다 어떤 삶을 일구는가 헤아려 봅니다. 멀리 살피기 앞서,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나부터 어떤 삶을 사랑하려는지를 돌아봅니다. 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좋아할는지를 곱씹습니다.

 보금자리는 어디에서 마련하고, 일자리는 어떻게 맞아들이며, 마음이 맞는 짝꿍은 어떻게 사귀려는지 생각합니다. 어떤 밥을 어떻게 차려서 어디에서 어떻게 즐기려는지를 헤아리고, 고맙게 즐긴 밥으로 얻은 기운으로는 무슨 꿈을 펼치는 어떤 일을 붙잡을는지를 곱씹습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을까요. 어버이가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면 아이들도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할까요.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고자 할까요. 어버이가 이웃하고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고자 한다면 아이들도 고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걸을까요.

 참다운 사람으로 씩씩한 나날을 누리려 할까요. 어버이 스스로 참다운 사람길을 찾으려 하면 아이들도 참다운 사람길을 찾으려 할까요.


.. 첫 귀국선이 출항한 1959년 말부터 귀국자들은 트럭과 기계류를 가지고 돌아갔지만, 상공인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무슨 기념일에는 조선의 문화재를 구입하여 보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 슬픈 일이지만 러일전쟁 때 개성 주변의 고려 왕릉과 귀족 묘가 파헤쳐져 고려청자 등 엄청난 양의 부장품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개성의 고려 고분에서 도굴당한 고려청자를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천황에게 헌상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의 도굴품,그리고 수많은 석불·석탑·석인이 골동품업자를 통해 반출되었다. 예를 들면 도쿄의 오쿠라집고관에는 평남 대동군 율리사 고려팔각오층탑과 경기도 이천의 정토사에서 가져간 고려오층탑이 있다. 또 네즈미술관에는 고려 귀족의 묘지에서 가져간 석인과 석수 일식이 있고, 석탑과 불상 등이 정원에 진열되어 있다 … 공주에 체재한 시간은 짧았지만 오랜 기간의 의문을 씻을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하지만 시내에는 5∼6층의 건물이 여기저기에 세워지고 있었다. 무모한 재개발을 막지 않으면 지하 2미터에 묻힌 옛 도읍의 유적은 영원히 파괴될 것 같아 몹시 걱정되었다 … 임진왜란의 격전지 진주성을 방문했다. 논개가 왜의 장수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성 안에 있던 많은 민가를 밖으로 옮기고 공원으로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안 단구와 강을 이용한 다소 기복이 있는 성이지만, 외적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역한 규모와 구조였다. 성벽 위의 총구멍 설비를 보고서는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군은 철포가 없었기 때문에 고전했는데, 총구멍을 설치한 것은 해방 후로, 복원에서 시대 고증을 무시하는 일은 역사의 날조와 연결되는 법이다 ..  (116∼117, 266, 271쪽)


 재일사학자 이진희 님은 당신 삶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거나 뽐내거나 으스대려고 글을 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무슨 반성문이나 참회록을 쓰는 마음이 아니요, 회고록이나 자서전처럼 되는 책을 내려고 글을 썼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고마운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선물받은 목숨을 하루하루 알뜰히 사랑하면서 보냈기에, 이렇게 보낸 기쁜 나날을 찬찬히 적바림하면서 당신 아이들 또한 당신 아이들 나름대로 하루하루 알뜰히 사랑할 나날을 보내기를 비손하듯이 글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기뻐하는 일이나, 《해협》이라는 책이나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더 빼어난 사진기를 갖추어 아이들 모습을 찍어야 어여쁘거나 사랑스러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스티커사진을 찍어도 얼마든지 어여쁘거나 사랑스러운 사진이 태어납니다. 1회용 사진기를 써도 애틋하며 살가운 사진이 태어납니다. 값싼 필름사진기를 쓰든 싸구려 똑딱이를 쓰든, 나 스스로 사랑하는 손길로 찍는 사진이라면 사랑스러운 사진이 태어나요. 나 스스로 사랑하는 손길로 쓰는 글이라면 사랑스러운 글이 태어납니다.


.. 조선대학 시절에는 풍경이나 화초에 마음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산진달래 꽃잎을 입에 머금자 고향 뒷산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이 뇌리를 스쳤다 … 30여 년 전 어머니 옆을 떠나던 때가 뇌리를 스쳤다. 우리 집은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있었는데 내가 몇 번이나 뒤돌아보아도 어머니는 ‘대문’ 앞에 서서 꼼짝도 않고 계셨다. 하얀 치마저고리 모습이 점점 작아져 점이 되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이별이었다. 참는 것만을 미덕으로 사시다가 마흔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생애를 생각하니 세상의 덧없음에 화가 났다. 언제 다시 성묘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니 어머니의 묘 옆을 떠나는 것이 가슴 아팠다. 눈물을 겨우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  (185, 284∼285쪽)


 집에서 살림하고 일하는 어머니들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집 바깥에서 훌륭하다는 일을 하는 아버지들도 글을 쓰면 좋을 텐데, 갓난쟁이일 때부터 집에서 아이랑 씨름하며 살아가는 숱한 여느 어머니들이 글을 쓰면 좋겠어요. 아이를 씻기거나 재우거나 젖을 물리면서 느끼는 사랑스러운 느낌을 찬찬히 글로 옮기면 좋겠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힘들었던 일이나 고달팠던 이야기를 찬찬히 글로 적바림하면 좋겠어요. 아이 스스로 당차게 서서 뜀박질을 하던 첫 날 이야기를 쓰고, 아이가 뛰며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진 이야기를 쓰며, 아이가 말썽을 피워 꾸짖었더니 울고 불고 하던 이야기를 쓰면 좋겠습니다.

 따로 책 한 권으로 태어나야만 글을 쓰는 보람이 있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꾸준하게 ‘아이와 어우러지는 삶’을 수수한 빛이 감도는 글로 담아서 내 아이가 스스로 글을 읽으며 생각밭을 일굴 만할 때쯤 넌지시 건네면 더없이 아름다운 일이 되리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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