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디에서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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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디에서든 삶
  • 최종규
  • 승인 2011.08.15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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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제레미 머서,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프랑스 파리에 있다고 하는 헌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보낸 나날을 돌이키면서 적바림한 이야기책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시공사,2008)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책에서는 ‘고서점’이라는 낱말을 쓰지만, ‘고서(古書)’와 ‘헌책’은 다르지 않습니다. ‘헌책’을 한자말로 옮기면 ‘古書’가 될 뿐입니다. 때로는 ‘옛책’이라 할 만할 텐데, 수백 해를 묵은 오래된 책, 말 그대로 옛책을 사고파는 일은 퍽 드물고, 퍽 가까운 요즈음 책을 사고팔 터이니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써야 걸맞습니다.

 한국사람은 헌책방을 헌책방이라는 이름 그대로 쓸 줄 모릅니다. ‘헌-’이라는 앞가지를 붙이면 어딘가 께름하다고 여깁니다. ‘헌것’이나 ‘헌옷’이라 할 때에는 이제 못 입을 만큼 지저분한 옷이라고 여기고 맙니다. ‘헌-’이라는 낱말은 “오래되어 처음 모습 같지 않은”을 가리킬 뿐이지, “오래되었기에 너덜너덜하거나 못 쓰게 된”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낱말뜻부터 올바르게 헤아리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오래된 책이 아니더라도 한 번 사람 손길을 타면 “처음 모습 같지 않”습니다. 손자국이 묻거나 손때를 타니까요. 모든 책은 헌책이 돼요.

 옷은 ‘헌옷’입니다. 굳이 한자말로 ‘구제(舊製)’라 적거나 영어로 ‘빈티지(vintage)’라 적어야 멋이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빈티지’는 포도술을 가리키는 영어입니다. 껍데기를 씌운대서 빛이 나지 않는 말이요 옷이며 책입니다. 겉치레를 해야 남다르거나 돋보이거나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울 속살이거나 알맹이여야 합니다. 꾸밈없이 아름다운 넋이거나 얼이어야 해요.


..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탐으로써 신체적인 위협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매듭들이 남은 채였다. 우선 돈이었다. 신문사의 급여는 후했고 부수입으로 범죄 실화 책을 써서 들어오는 인세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그 돈을 다 써 버렸다. 매일 밤 술과 음식으로 흥청거렸고, 햇살 좋은 섬으로 겨울 휴가를 갔으며, 꼭 필요하지도 않은 독일산 자동차를 몰았고, 전자 제품을 말도 안 되게 사들였다. 거의 틀지 않는 CD가 장식장 몇 개를 차지했다. 어느 해에는 설거지하는 게 귀찮아서 일회용 접시와 포크, 컵을 잔뜩 사들이기도 했다 ..  (22쪽)


 이야기책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을 쓴 제레미 머서 님은 캐나다에서 신문기자로 일할 때에는 한껏 껍데기와 겉치레로 둘러싸인 채 지냈습니다. 아니, 껍데기만 볼 줄 알고 겉치레만 할 줄 알았습니다. 글쓴이 둘레에는 글쓴이와 매한가지라 할 만한 사람들만 있었고, 서로서로 얼마나 껍데기요 겉치레인가를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아주 마땅하며 즐겁고 넉넉한 삶이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잘 된 일인지 안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글쓴이는 캐나다에서 흥청망청 누리던 삶을 더 이을 수 없습니다. 얼른 몸을 빼내어 멀리멀리 내빼야 합니다.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빈털터리인 채 비행기에 올라타고 프랑스 파리로 갑니다. (그런데 빈털터리가 되었다면서 어떻게 프랑스 파리로 가서 떨꺼둥이가 될 생각을 했다지?) 스스로 겉멋을 버리지 못했으니 프랑스 파리로 갔을 테지요. 스스로 겉멋이나 껍데기를 벗을 줄 알았다면, 글쓴이는 캐나다 깊은 숲속이나 두메나 멧골로 들어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서 센 강가를 거닐다가 헌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만났기에, 이곳에서 여러 해 지낸 삶을 돌이키면서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을 씁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캐나다 깊은 숲속에 깃들면서 너른 자연이 베푸는 따사로운 품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새로운 윌든’이나 ‘새로운 초원의 집’을 썼을 수 있겠지요.


.. 열심히 공부하는 아블리미트가 사라지자 서점은 더욱 가벼워진 듯했다. 그리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서점이 정말 확실히 가벼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럽과 북미의 대학에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열차를 가득 메운 배낭 여행객들이 파리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여행 안내서마다 실려 있었으므로, 필히 보아야 할 관광 목록에 서점을 넣고 30초 만에 서점을 휙 둘러보는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았다 ..  (284∼285쪽)


 삶은 어디에서든 삶입니다. 역사가 깊은 책방 한 곳에서도 삶이고, 역사가 짧은 책방 한 곳에서도 삶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다는 이름난 헌책방도 삶이며, 제주섬이나 춘천히 한켠에 곱게 자리한 헌책방도 삶이에요. 제레미 머서 님이라면, 프랑스 파리에서뿐 아니라 진주시나 청주시에 깃든 헌책방에서 일꾼으로 여러 해를 보냈더라도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하루하루 살아숨쉬는 헌책방”을 썼을는지 모릅니다.

 시간은 멈출 수 없거든요. 시간은 고일 수 없거든요. 시간은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거든요.

 시간은 흘러요. 시간은 달라져요. 시간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백 해 앞서 누군가 만든 책이라 하더라도 백 해 앞선 때를 살던 사람이 이 책을 읽을 때하고, 백 해가 흐른 오늘날 내가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맛과 멋과 깊이와 느낌이 아주 다릅니다. 책이 책 그대로가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 지난 1월 비 오는 일요일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를 발견한 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지는 내가 더는 말을 못하게 막았다. “있잖은가, 내가 항상 이곳에 대해 꿈꾸는 게 있어. 저 건너 노트르담을 보면, 이 서점이 저 교회의 별관이라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 저곳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별관.” ..  (313쪽)


 헌책방이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이라서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새책방도 좋고 책쉼터도 좋으며 북카페도 좋습니다. 책으로 삶을 꾸리는 책삶인 책꾼이라면 어떠한 책터가 되더라도 좋아요.

 내가 쉬고 내가 살며 내가 일할 곳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면 됩니다. 내가 놀며 내가 어울리고 내가 발을 디딘 곳에 무엇을 놓을는지 생각하면 됩니다.


―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글,조동섭 옮김,시공사 펴냄,2008.1.2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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