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花街洞(화가동) 애사(哀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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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花街洞(화가동) 애사(哀史)
  • 김석배 객원기자
  • 승인 2011.09.0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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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배의 인천이야기] '인천의 유곽'

1920-30년대 일본 유곽 입구

해방 전 인천에 화가동이라 불리는 유곽이 있었다. 그 원류는 일본의 공창제도를 본딴 것이다.  10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고급 유곽에는 花魁(오이랑)이라고 칭하는 '언니뻘 창녀'들이 있었다. 미녀에다 하려한 몸치장, 거기에다 예절교육까지 받고 기예에도 능했다. 예기(藝妓)와 창녀를 겸직을 한 셈이다. 이런 고급유곽에는 돈많은 한량들이 단골 고객이었고, 서민층은 단순한 성매매를 위해 유곽을 찾았다.

조선인 유곽은 성매매를 위한 유곽일 뿐이다. 당시 기생들은 용동의 기생조합인 老妓(노기)가 경영하는 건반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다. 요리집에서 손님이 기생을 부르면 인력거를 타고 가서 술자리에 앉아, 술시중과 가무를 제공하였다. 기생들은 모두 권번의 주인인 노기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양딸로 살고 있었다.

조선인 유곽에서 손님들은 들어가서 마주한 창녀 중 고르거나 비치된 사진을 보고 상대를 찾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기록한 자료를 보면 유럽에서는 독일 함부르크 항에 있는  공창가가 유일했는데, 대형 창문 안에 창녀들이 앉아 찾아오는 선원들을  유혹을 하였다고 한다. 속칭 '함부르크의 쇼윈도'(당시 일본말로 '가다리마도'라 했다)라는 이 공창가가 번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유곽의 창녀들은 말로는 비참했다. 흉년이 들면 저축하여 놓은 돈이 없는 소작농 딸들이 많았는데, 200원에 팔아 남은 가족들이 다음 추수때까지 허기를 면하였다. 다음해에 풍년이 들어도 소작농은 지주한테 받은 소작료는 먹고 살기가 빠듯하니 딸 판돈 200원을 마련할수 없어 영원히 딸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이들은 성병에 걸려 치료하여도 완치를 잘 못하였고, 상품가치가 없어 밥만 축내는 골치덩어리로 결국 유곽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리고는 거지가 되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고 다녔다.

필자가 어렸을 때, 이런 창녀 출신 거지가 자주 구걸하러 왔다. 우리 어머니는 불쌍하다고 밥과 찬을 주니 자주 찾아왔다. 이렇게 비참한 구걸 생활을 하다가 횡사하든지, 미쳐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 였다. 당시 창녀들의 노후는 처참하였다.

1953년 초 1.4 후퇴로 부산에 피란을 갔던 시절 '금달래'라고 불리는 노기가 나이들어 창녀로 살았는데, 그러다 미쳐서 대낮에 옷을 홀랑 벗은 채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였다.
해방 전에 유곽이 있었던 신흥시장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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