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중턱에 들어섰다. 얼마 전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눈 것 같은데 벌써 덥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달력을 넘기며 2023년의 한복판에 있는 나를 바라본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잠시 멈춰 한해의 중턱을 바라볼까 한다. 한숨 돌리고 싶을 때면 나도 모르게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햇빛이 쏟아지는 창을 직면하면 순간 눈이 번쩍이며 몸이 둥실 띄어지는 듯하다. 빛과 마주하는 순간 번쩍이는 그 색감은 노랑과 빨강 사이 주황색이다. 절정에 이르는 빨강에 도달하기 전의 ‘주황색’을 6월의 색으로 정해봤다.
주황색은 점진적으로 팽창하는 색이다. 빠르지 않지만, 밝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번져가는 주황색은 햇빛처럼 다정한 느낌이 든다. 햇빛은 시간대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데 해가 뜰 때와 노을이 질 때는 색이 짙어서 주황빛을 띤다. 물론 그날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맑은 날 주황빛으로 변한 햇빛을 보면 왠지 그를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필자의 두 번째 그림책 [눈물조각, 2021]에 ‘빛을 따라가자’라는 글귀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그림1) 그림책 속에서 아기별은 빛 끝에 뭐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용기를 가지고 빛을 따라간다. 책 전면을 빛으로 가득 메웠는데, 주황빛의 빛을 그리며 나도 함께 그림에 빨려들어 정신없이 그렸다. [눈물조각] 그림 중 흡족하게 작업한 장면 중 하나이다.
전에 그렸던 그림을 보면 작업할 때의 감정과 시간이 떠오른다. 그림은 멈춰있지만 그를 봄으로 마음의 움직임이 생긴다. 그림은, 그림을 매운 색에는 그런 신기한 힘이 있다.
주황색을 볼 때면 현재 변화하고 있는 큰 흐름 속의 나를 살펴보게 된다. 한순간도 멈춰있고 머물러 있는 건 없지만 괜찮다고 주황색이 말을 한다. 특히 6월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일상을 보낸 요즘은 주황을 보는 마음으로 잠시 멈춰보고 싶다. 멈춰 나의 마음도 살피고, 주변도 돌아보고 변한 계절도 한번 바라보고 싶다. 그런 쉼표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올해 그린 Flash 시리즈는 햇빛과 마주한 번쩍하는 순간, 찰나에 비친 빛의 이미지를 담았다. (그림2)(그림3) 앞에 소개한 그림의 오마주와 같은 유화 작품들이다.
종이에 인쇄되는 그림책 작업보다 캔버스 위에서 하는 회화 작업은 좀 더 물리적인 작업이다 보니 좀 더 재료의 물성이 드러나는 표현을 할 수 있다.
요즘은 유화 물감을 흐르게 하거나 튀기고 닦아내기도 하면서 유연한 물감의 물성을 이용해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화를 시작한 지 20년에 가까워지고 직업 작가로서 계속 작업을 했지만, 재료에 대한 연구와 더 나은 표현을 위한 애씀은 끊임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어떤 종착지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현시대 미술 작가로서 어떻게 작업을 더 발전시켜야 할까?’에 대한 고민만 커진다. 점점 더 섬세하게 풀어 가야 하는 다음 단계의 과제가 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아직 그러한 과제들과 마주할 수 있는 나 자신에 감사하기도 하다.
습관처럼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더 잘 활용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빛이 불투명한 여러 막을 투과해 비추는 듯하게 담기 위해 얇게 물감을 문지르거나 부분부분 닦아내기가 가능한 유화 물감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작업 역시 이러한 과정 중에 있음을 한숨 돌리며 이야기를 풀어봤다. 은은한 주황빛과 함께 잠시 쉬어가는 여유도 즐길 수 있는 6월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