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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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고 싶어서
  • 채이현
  • 승인 2023.07.11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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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독후감, 책울림을 나누다]
(7) 눈에 선하게 / 권성아, 김은주, 이진희, 임현아, 홍미정
- 채이현 / 자유기고가

 

“어느 시각장애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삼겹살 굽는 소리를 소나기 내리는 소리로 알아들었다고. 눈을 감고 들어보면 두 종류의 소리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는 ‘삼겹살을 굽는다’는 화면해설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장면을 계속 오해한 채 지냈을 거라고 했다.”

 

‘화면해설’이란 ‘시력이 약하거나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TV나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설자가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 서비스’를 말한다. 영상 속 장면 전환이나 등장인물의 표정, 몸짓 그리고 대사 없이 처리되는 모든 화면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화면해설’이다. 그리고 그 원고를 쓰는 게 직업이 사람이 ‘화면해설작가’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아 자막 방송 말하는 거구나.”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자막을 어떻게 보겠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만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권성아, 김은주, 이진희, 임현아, 홍미정 이 다섯 명의 화면해설작가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소개하는 책이다. 단순히 업무에 대한 소개가 아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지, 이 일이 왜 꼭 필요한지 자신의 소신을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히 누군가를 위한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원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혼자 생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고 자부심이 덧붙은 직업이다.

화면해설가가 아니라 화면해설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알 수 있다. 배우들의 대사와 겹치지 않으면서도 분위기와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묘사를 찾는 것,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배경 씬이 주는 감정선을 전달하는 것, ‘그것’과 같은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화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화면을 고스란히 전해주기 위해서 ‘착 달라붙는 말’을 찾아내서 재창조해내기 때문에 ‘작가’인 것이다.

이들은 좋은 화면해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한다. 어떤 시각장애인은 화면해설이 빈틈없이 설명하려다보니 정작 자신이 감정을 느낄 시간이 없다는 모니터링을 해 주고, 어떤 시각장애인은 노을이라고 해도 다 같은 노을이 아닐텐데 조금 더 자세한 묘사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모니터링한다. 결국 사람마다, 시각 손실의 정도에 따라,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에 따라 화면해설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다는 얘기다. 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영상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분하게 느낄 수 있게 꼼꼼하게 노력하는 것이 화면해설작가의 일이다.

자막 자체가 웃음의 포인트가 되기도 하고, 비시각장애인들이라면 바로 눈치챌 수 있는 별명 같은 것들 하나하나까지 해설을 해야하는데 문제는 또 그것이 맥을 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해설은 남들이 웃을 때 자신도 같이 웃을 수 있는 해설인 것 같다”는 어떤 시각장애인의 말에 짧은 순간에 치고 빠지는 멘트를 써 내려가기도 한다. 멘트 이면에 깔린 화면해설작가의 의도를 알아채고 가장 적합한 톤으로 읽어주는 성우와 만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한국에서 화면해설방송이 시행된 것이 20년이 넘지만, 아직까지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10분 가량의 방송 분량을 위해 한 두시간은 훌쩍 넘길 정도로 집중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엉뚱하게도 화면해설 분야는 소위 ‘드라마 덕후’들 사이에서 더 알려지기도 했는데, 화면해설작가들의 표현이 생생하고 작품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의 제작 여건이 좋지 않은 만큼, 이것을 다시 해석하고 표현해 내야하는 화면해설작가들의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시간에 쫓기는 만큼 아쉬움은 커지고, 결국 잠을 줄이고 무리하게 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면해설을 위해 전체 대본의 맥락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경우도 없어 혹여나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영향을 주는 설명인지 아닌지도 오롯이 화면해설작가가 판단해야 한다. 화면해설작가는 누군가를 상상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 눈을 감고 자신의 해설을 들었을 때 ‘걸리는 것’이 없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혹여나 놓친 부분이 없는지 점검한다. 이들의 수고로 누군가는 인생작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장애인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가족들이나 돌봄 시설이 책임지면 된다는 생각에 맞서 오늘도 많은 이들이 투쟁하고 있다. 장애인도 이동 제약 없이 사람들과 교류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 외침을 오늘도 수 많은 문자와 원고로 응원하고 있는 화면해설작가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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