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日人 모두 제끼고 5년 내리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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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日人 모두 제끼고 5년 내리 수석
  • 김윤식
  • 승인 2023.09.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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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1)最古의 맏형, 仁川中 제1회 故 방희 전 대사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in이 9월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활약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1960년 제고 전경. 웃터골로 불리던 이곳은 1936년 학교가 들어서기 전 인천부공설운동장 부지였다.

 

- 인천中 1회 입학생 55명, 한국인은 5명

무릇 같은 학교 동창회 선후배 간을 형과 아우라고 표현할 때, 방희(方熙 1922~2022) 전 대사는 현 인중제고총동창회 회원의 제일 위 맏형이 된다. 1935년 4월 인현동 옛 축현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개교한 인천공립중학교(仁川公立中學校) 제1회 입학생이기 때문이다.

이들 1회 맏형들이 웃터골, 현재의 제물포고등학교 터전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입학 이듬해인 1936년 4월, 교사(校舍) 신축이 완료되면서부터이다. 학교 신축 이전, 웃터골은 야구, 축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사민, 학생 운동회가 열리던 인천부공설운동장 부지였다.

여기서 미리 밝혀둘 것은 방 전 대사가 입학할 당시 인천공립중학교는 일제 치하 주로 인천부 및 인근의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 개교한 학교라는 점이다. 따라서 광복 후 바로 그 자리, 그 교사에서라고는 해도, 길영희 교장에 의해 개교한 우리의 인천중학교와는 근본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천공립중학교 개교(1935. 4. 26. 경성일보)
인천공립중학교 개교(1935. 4. 26. 경성일보)

 

그러나 인천공립중학교는 매해 정원의 10%정도 한국인 학생의 입학을 허용했는데, 광복 후 미 군정 하에서 그들 인천공립중학교 한국인 졸업생, 재학생, 그리고 학부형들이 앞장서 길영희 교장을 초빙해 인천중학교를 개교토록 함으로써 인중제고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게 한 주체들이자 첫 동문이 된다는 점이다.

방희 학생이 입학할 당시 인천에는 인문계 중학이 전무했다. 이 때문에 인천 학생들은 전문학교나 대학 등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중학교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다.

그러니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거나 매일 통학을 해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런 사정은 193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이어졌고, 이에 따라 인문계 중학 설립에 대한 시민의 요구와 열망이 비등했다.

이 같은 시민의 여론은 1935년 결국 인천공립중학교 개교로 이어졌고, 한국인 학생에게도 협소하게나마 입학의 문호가 개방되었던 것이다. 개방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인 학생 50명에 한국인 학생은 고작 5명으로 10분지 1의 비율이었다. 방희 학생이 바로 일본인 학생들 틈에 낀 그 다섯 명 한국인 입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당시 합격한 한국인 입학생의 성명은 김영식(金榮植), 정덕용(鄭德溶), 방희(方熙), 조순태(趙順泰), 김덕순(金悳舜) 으로, 1935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에 나와 있다.

 

방희 전 대사(1922~2022) - 한국광업협회 제공

 

- 일제에 빼앗긴 졸업생 1등상

여기서 방희 학생의 인천중학 졸업 당시에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였는데, 방 대사는 1학년부터 5학년 졸업 때까지 5년 동안 내리 전교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방희 학생은 졸업식에서 당연시됐던 ‘최우수상’ 대신에 명칭이 ‘5개년학업우수상’으로 바뀐 별도의 상을 수상해야 했다. 바로 그 에피소드를 아직 미발간 상태이나 『仁中濟高70年史』초고의 기록을 통해 밝힌다.

 

1940년 3월 5일에 인천중학교 5년제 제1회 졸업식이 있었다. 42명 졸업생 중 한국인 학생은 4명이었다. 입학 당시 일본인 학생은 51명 중 13명이 졸업을 하지 못했다.

이 1회 졸업생 1등상 수상자 선정에 한국인 차별로 의심되는 사건이 생겼다. 확실한 물적 증거는 없었으나, 한국인 1기생들은 졸업 후 반세기가 더 지난 후일까지도 그 문제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었다.

당시 仁中 5년제 1기 졸업생 전제 수석은 한국인 1기생 방희 학생이 공인되다시피 했는데, 돌연 일본인 학생이 5학년 1등상을 수상을 한 것이다. 당시의 학적부를 확인해 본 결과 4학년 때까지는 방희 학생이 1등 2회, 2등 2회를 기록해 거의 정상권에 있었던 것이 판명이 되었는데, 문제는 졸업반 5학년 때의 성적이었다.

5학년 대부분의 과목에서 점수가 1등으로 기록되었으나, 특이하게도 수신(修身)과 공민(公民) 과목만은 최하위 점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총점에서 5점 차이가 나는 바람에 1등을 놓치게 된 것이었다.

수신과 공민이 두 과목은 평소의 수행평가 성적이 비교적 크게 반영되는 주관적 평가 과목이기는 해도 4학년까지 모든 과목에서 1, 2등을 하던 학생이 유독 마지막 5학년에 들어서 최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인 학교의 제1회 졸업식에서 한국인이 전체 수석을 차지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는가. 더구나 일본인 졸업생은 38명이고 한국인 졸업생은 불과 4명이 아닌가. 일본인 학부모나 교사들 사이에서 성적 조정에 관한 논의가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다른 과목의 점수는 객관식이어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고, ‘평소의 점수’ 핑계를 대면서라도 그나마 점수 수정이 가능한 과목이 수신과 공민 과목인데, 바로 이 두 과목에서 평소와 다른 최저 점수가 나왔다는 것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천중학교가 거의 일본인 학생 학교였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학교에 비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 따위를 크게 강조하는 바가 없었고, 극소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가 별로 없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제1회 졸업식에서 나타난 것이다. 일본인 학생에게 의혹의 1등상을 수여한 것을 통해 역시 일본인들의 속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1회 졸업식은 끝이 나고 한국인 학생들은 억울한 마음을 훌훌 털고 학교 앞, 응봉산 남쪽 능선에 있는 인천부립도서관(仁川府立圖書館)으로 올라가 함께 축하도 하고 마지막 교가도 부르고 다른 노래도 불렀다.

 

(좌)인천공립중학교 제1회 한국인 입학생(1935. 4. 27. 매일신보)  (우)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 수상자(1940. 3. 7. 조선신문)
(좌)인천공립중학교 제1회 한국인 입학생(1935. 4. 27. 매일신보) (우)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 수상자(1940. 3. 7. 조선신문)

 

이것이 『仁中濟高70年史』의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방 전 대사의 학력의 출중함을 기리면서, 일인(日人)들의 옹졸하고 부당한 행위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당시 한국인 동급생들의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전해져 온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1940년 3월 7일자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은 우등 졸업생 3명 중에 일본인 학생 佐脇淸 다음으로 방희의 이름을 싣는다. 2등이라는 의미인데, 그러고는 저들도 양심이 좀 켕기었던지, 방희 대사를 위에서 말한 별도의 ‘5개년학업우수’ 수상자로 해놓은 것이다.

다수의 일본인 학생 틈에 끼여 방희 학생이 5학년, 전 학년 동안 줄곧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는 것은, 일인 학생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자신의 피나는 학구 노력과 열정 외에도 한국인의 선천적 총명함이 뒷받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 만주 건국대로 진학하다

뛰어난 성적으로 1940년 인천공립중학을 졸업한 방희는 만주에 있는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경제과에 진학한다. 이 학교는 1938년에 1기 학생이 입학해 개교했다. 연혁에 비해 이 학교는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던 학교였다. 실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과 동시에 합격한 학생이 오히려 만주 건국대학교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학생들 전원 학비 면제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는 데 드는 생활비 일체를 무상 관비로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학교 졸업 후 6년간은 그 비용을 변제한다는 의미에서 의무적으로 만주국 관리로서 복무해야 하는 조건이 따랐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졸업과 동시에 최소 6년간은 취업이 보장되는 유리한 제도라는 점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당시 한국인 수재들 상당수도 이 대학에 입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건국대학교에 입학했던 여러 인사들이 지난 날 우리나라 정계, 재계, 교육계, 그리고 군 계통에서 활약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천중학교 재학 5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 방희도 아마 이런 호조건 때문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건국대학에 입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건국대학은 다른 대학의 예과(豫科)라고 할 수 있는 전기 3년, 그리고 본과(本科)격의 후기 3년, 총 6년제의 학교였다. 1940년도 입학생인 방희는 후기 마지막 6학년째인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과 함께 소련군의 만주 진주로 학교가 폐쇄되면서 남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신축 제고 교사

 

- 육사 특별반 생도로 입교, 소장으로 예편

광복 직후와 1946~47년, 방희의 활동은 알려진 바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틀 후인 1948년 8월 17일,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 생도로 입교해 군 장교가 되는 기록만 확인된다.

방희 생도가 군 장교로 발을 딛게 된 것은 아마 만주 건국대학 재학 시절 전공학과 교육 외에 학교에서 받은 군사훈련으로 체계적인 군 지식을 습득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 인터넷 「위키백과」는 ‘건국대학에서의 군사훈련은 매우 엄혹한 것으로 분열행진훈련, 사격훈련, 격투훈련, 심지어 글라이더 조종훈련까지 실시해 하급 장교 정도의 전투 지휘 능력 확보를 목표로 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육사에 입교한 방희 생도가 교육훈련 중 동급생 두 명의 목숨을 구한 일화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중앙일보 1983년 3월 8일자에 게재되어 있다.

내용인즉, 사관학교 입교 사흘 후인 8월 20일, 완전무장 장거리 구보 훈련 중 더위에 지친 두 명의 생도가 대열을 벗어나 물을 마시러 갔다가 그대로 절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또 다른 두 명의 생도가 물가에 기절해 있는 것을 맨 후미를 달리던 방희 생도가 발견해 절명 직전에 구해냈던 것이다.

그 경위를 들으면 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보 중의 방희 생도 역시 타오르는 갈증으로 물을 마시려고 개울가로 갔다가 저만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 생도를 발견했던 것이다. 대열 후미에 있던 방희 생도는 본대에 연락하기 전에, 우선 급한 대로 인근 부락으로 달려가 부락민들을 불러 응급 치료를 해 살려낸 것이다.

방희 생도는 입교 2개월 후인 10월 12일 육사를 졸업한다. 대부분 입교 전에 군사교육을 받았던 유경험자들이어서 이렇게 속성으로 교육을 마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속성 졸업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 국방을 위한 튼튼한 군 건설의 절실함, 그리고 그에 필요한 초급 군 간부 육성이라는 시급한 목적 때문이었다.

육사7기 특별반은 모집 요강에 ‘훈련 후 경력에 상당(相當)하는 계급 부여’라는 조항을 내세웠지만, 졸업생 대부분은 소위로 임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희만은 소위 이상의 계급으로 임관했는지 모른다. 왜냐 하면 6년 후인 1954년 12월에 이미 고급장교인 대령 신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12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대령으로 등장한다.

‘육군 제1군사령부 부관부장(副官部長) 방희 대령은 1953년 12월 15일부터 1954년 7월 27일에 이르는 기간 중 부관부 기간장병 편성과 훈련에 다대한 공을 세워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동성훈장(銅星勳章)을 12월 4일에 받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이다.

방희 대령은 전투병과가 아니었는지 6․25전쟁 중의 전투 기록이 없다. 앞의 기사처럼 군 행정, 교육병과에서 두각을 나타낸 엘리트 형 군인이었던 듯하다. 1952년 육군부관학교 교장, 1953년 육군대학 졸업, 1954년 미국고급부관학교 졸업, 1955년 육사 교수부장, 1957년 국방부장관 보좌관, 그리고 1960년 육군본부 부관감실 부관감 등 그가 걸어온 군 내에서의 발자취가 그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방희의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이다. 그러나 언제 장성으로의 진급했는지 그 일자는 불명하다, 군으로부터 전역한 일자 역시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1961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의 “정부는 11일자로 예비역 육군소장 방희 씨를 영국 주재 공사로 임명 발령하였다.”는 보도 내용으로 미루어, 이 직전 무렵에 육군본부 부관감실 부관감을 끝으로 예편한 뒤 외교관의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인다.

 

(좌) 방희 대령(1954. 12. 6. 동아일보) (우) 방희 주영공사 임명(1961. 10. 11. 동아일보)
(좌) 방희 대령 동성훈장 수여(1954. 12. 6. 동아일보) (우) 방희 주영공사 임명(1961. 10. 11. 동아일보)

 

- 주영 공사, 스웨덴 대사 등 외교무대로  

이어 방희는 1962년 3월 7일 주영 공사로서 인도 뉴델리 초대 총영사직을 겸임한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동남아친선문화사절단 부단장으로 동남아 5개국을 순방하면서 그들 국가와의 인사교류, 문화협정 체결을 위한 초석을 놓고, 아울러 유엔에서의 우리 정부 방침에 ‘충분한 납득과 이해를 갖도록 하는 데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1963년 주일대표부 재일동포 법적지위 담당 공사, 1966년 우간다, 르완다 겸임대사, 1971년 제4대 스웨덴 대사와 함께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겸임대사를 역임하는 등 10여 년이 넘는 동안 국제 외교 무대에서 크게 활약했다.

외교관 생활을 접은 후, 方 대사는 그 동안의 풍부한 국제사회 경험과 경륜을 살려 사회 각 분야에서 수완을 발휘한다. 간략하게 기록하거니와 한남한국슈퍼마키트 회장, 대한광업 회장·광업협동조합 이사장, 광산학원 이사장,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광산장학회 이사장, 평화연구원 이사장, 백구회장·명예회장, 추계학원·찬영학원 이사 등이 그가 활약했던 단체들과 직함이다.

서울 출생으로 알려진 방희 전 대사는 2022년 3월 정확히 한 세기의 생을 살고 타계했다. 금년이 타계 1주년, 탄생 101년이 되는 해이다. 인천중학의 수재로서, 건국 초기와 전쟁 당시 국가의 간성으로서, 또 우리나라 외교의 첨병으로서, 그리고 후일 사회 여러 분야의 공헌자로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방희 전 대사는 충무무공훈장, 수교훈장, 그리고 앞서의 미국 동성훈장을 수상했다. 국립묘지에 육사7기 특별반 생도들만이 유일하게 세운 동기 위령탑에는 ‘方熙’ 성명 두 글자도 새겨져 있다.

인중제고 전 동창생 가운데 가장 맏형인 방희 전 대사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제7대~8대 인중제고총동창회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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