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동경아시안게임, 고2 때 움켜쥔 동메달
상태바
1958년 동경아시안게임, 고2 때 움켜쥔 동메달
  • 김윤식
  • 승인 2023.09.17 0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중제고 사람들]
(3) 주창복 - 고교생 국가대표 탁구 선수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in이 9월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활약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국가대표로 경기중인 주창복 선수(등을 보이는 선수)
이하 사진은 주경미씨(주창복 선수 딸, 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현 동양미술연구소 소장) 제공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를 통틀어 국가대표 출신 스포츠 선수는 불과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는 야구와 농구에서 우수 선수가 출현해 국가대표, 또는 대표급 선수로서 활약하고 있으나 1950∼60년대에는 거의 없었다.

인중·제고는 전통적으로 전교생의 학력 배양을 중시하는 학교로 알려졌으나, 이에 못지않게 충실한 체력 보강 역시 중요히 여겨 전교생 모두가 각자 원하는 운동부에 들어가 체육 활동을 하게 했다. 체육 활동은 물론 방과 후나 휴식 시간에 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엘리트 체육 선수를 육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교생 모두의 체력을 증강하는 데 기본 목적을 둔 교육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실제 운동부의 운영은 전문 코치나 감독을 두지 않는 ‘동호인’ 혹은 순수 ‘아마추어적’ 방식이어서 청소년 대표라든지, 국가대표 같은 특출한 선수는 거의 배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 고 2때  국가대표로 

그런 중에 인천중학교 6회, 제물포고등학교 제3회 졸업생인 주창복(周昌福(1941∼2003)) 선수가 1958년도 5월에 개최된 제3회 동경 아시안게임에 탁구 국가대표로 출전, 남자 복식 게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다. 실제 국가대표로 선발 확정된 것이 1958년 3월이었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 말, 만17세 시절이었다.

 

1958년 2월, 동경아시안게임 동메달

 

사실 학교 내 운동부의 운영이 동호회나 클럽 수준이었다면 전문적인 코치가 있을 리 없고, 또 뛰어난 실력의 라이벌 동료 선수라도 있어 경쟁하던 것도 아니었을 터인데, 전국의 내로라하는 ‘전문 선수’들을 물리치고 대표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그 실력이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군의 국가대표 실력을 주 선수가 평소 어떻게 체계적으로 연마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여담이지만 주창복 군의 동생 주창석 또한 형 못지않은 한국 탁구계의 거성이었다. 1966년에 한국 탁구 대표선수가 됐고 한국 탁구의 기린아라고 불리던 선수다. 당시 체육계 전 종목에 걸쳐 '최정상인'으로 인정받았을 만큼 실력이 있던 선수였다.

그는 형 주창복의 전통적 펜홀더와는 달리 당시 동양에서는 드문 쉐이크 핸드 수비 전문 선수(일명 커트 선수)였다. 여기에는 필자가 제고에 다닐 때 들은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주창복 군이 연습 상대로 어린 동생 주창석을 데려다 자기의 펜홀더 공격을 받아낼 수 있게 처음부터 동생을 쉐이크 핸드 그립으로 훈련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동생 주창석은 형의 스매싱을 되받아넘기는 일을 반복하는 중에 세계적 수비의 달인이 된 것이다.

이 글은 주 선수의 동기동창인 태종수 동문의 증언으로 모교 인터넷 소통 공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우선 주복, 창석 형제가 자기들끼리의 연습을 통해 국가대표가 된 참으로 특이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더구나 형이 자신의 팬 홀더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형 세이크 핸드 훈련을 동생에게 시켰다는 것은 탁구의 공수 운용상 장단점을 꿰뚫어 알고 있다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주 선수의 두뇌는 벌써 세계 탁구의 흐름도 내다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창복 선수가 운동 경력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앞선 것이 1956년 11월에 열린 제2회 전국학생탁구선수권대회 출전 기록이다. 제물포고등학교 1학년 재학 시절로서, 이 대회 남고부 복식 결승전에서 이경훈과 콤비를 이루어 서울 경동고 복식조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이미 이때 동생 창석과의 훈련 성과가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일까. 앞서 말한 두 형제의 훈련 방법이었다면, 고등학교 1년생 형과 초등학교 5학년 아우가 이루어낸 놀랄 만한 성과라고 할 것이다.

 

1964년 주 선수가 소속된 한국 전매청 탁구단이 대만 전매청과 친선교류전을 위해 대만을 방문했다. 사진= 주경미씨(주창복 선수 딸, 전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현 동양미술연구소 소장) 제공

 

- 4형제 모두 국가대표 스포츠인

천부적 재능과 부단한 노력이 국가대표를 낼 것이다. 실제 주 선수가 전문 코치의 지도를 받은 바 없다고 해도 바로 아버지로부터 스포츠 DNA를 타고 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 선수 4형제가 모두 국가대표 스포츠인이라는 사실에서 증명될 것이다.

한 가정에서 4형제가 모두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한 스포츠 가정은 희귀하다. 주창복(탁구) 창석(탁구) 창옥(유도) 창남(테니스)의 주 씨 일가는 그래서 더욱 유명하다. <중략>

올해 37세인 탁구의 창복 씨는 이미 현역에서 은퇴, 부친의 유업(遺業)을 계승하고 있는 실업인. 인천중학 때 탁구를 시작, 제물포고, 경희대, 육군, 전매청을 거치는 동안 대표선수 생활을 했다. 58년 그러니까 제물포고 2년 때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에 대표선수로 원정을 간 것이 대표선수의 시작이었다. 은퇴하기 전해인 69년에는 전국종합선수권대회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탁구의 창석 씨는 올해 32세. 서울은행 대리로서 서울은행 팀 코치며 곧 코스타리카에 탁구 지도자로 떠나게 되어 있는 중진 탁구인. 창석 씨 역시 인천 동산고와 경희대를 거치는 동안 줄곧 우리나라 탁구 대표선수였다. 66년 대학 2학년 때 대표선수로 픽업되어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를 비롯 뮌헨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싱가포르 아시아선수권대회, 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대회, 나고야 아시아선수권대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국제대회에 태극 마크를 달고 국위를 선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타이틀만도 자그마치 8번이나 획득했던 형 창복씨보다 훨씬 화려한 캐리어를 갖고 있다.

1975년 8월 5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주 선수 형제들에 관련한 기사이다. 그러니까 주창복 선수을 비롯해 이들 4형제가 모두 국가대표 선수가 된 것은 천부적인 재능, 곧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포츠 유전자와 형제들 상호간 선의의 경쟁, 노력 같은 것이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때 이 보기 드문 국가대표 4형제의 공적에 대해 포상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 당시 KOC 위원에 새로 선임된 정우식 테니스협회장이 김택수 KOC 위원장에게 이들 4형제를 특별 포상하자는 건의를 했던 것이다. 김 위원장이 “건설적인 의견이니 연구 검토해 보자”고 공감을 표했다는 기사가 1972년 2월 10일자 경향신문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 무렵 주창복 선수는 은퇴한 뒤 가업인 목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아우 창석은 코스타리카 탁구 대표팀을 맡고 있고, 창옥은 베네주엘라에 유도 사범으로 나가 있었던 까닭에 표창은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4형제가 다 국내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거기에 현역으로 활동하는 선수는 테니스의 주창남 선수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국내 랭킹 1위의 주청복 1965. 12. 17. 동아일보
국내 랭킹 1위의 주창복 1965. 12. 17. 동아일보

 

앞에서 말한 대로 주 선수의 활동 기록은 1956년 11월에 열린 제2회 전국학생탁구선수권대회 전적이 가장 앞선다. 다음이 1958년 2월의 동경 아시안게임 탁구 국가대표 선수 선발전 출전 기록이다. 이때는 주 선수가 제물포고등학교 2학년 말, 곧 3학년 진급을 두 달쯤 앞둔 시절이다.

이 선발전은 2월 8∼9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 경기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참가 선수 12명이 풀 리그로 대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주 선수는 7승 4패의 전적으로 4위를 차지, 1차 선발된다. 1위는 대구 대륜고 졸업을 며칠 앞둔 3학년생 박성인 선수로 9승 2패, 2위는 박성인과 동기인 金境峻 8승 3패, 그리고 3위는 이달준으로 7승 4패의 성적이었다. 주 선수와 이달준은 같은 학년에 승률도 동률이었다.

그러나 2월 22일 협회의 1차 선발 명단에는 정선수(正選手)로 박성인, 김경준, 주창복, 후보선수로는 박종호, 정길화, 이달준으로 발표된다. 정선수 3명은 부동(不動)이고 후보선수 중에서 1명을 뽑아 정선수로 올리는 방식으로 최종 4명이 선발되는 것이다. 결국은 3월 23일 후보선수 중 이달준이 승격됨으로써 최종 네 선수로 확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5월에 열린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수상하는 것이다.

1959년 제40회 전국체전우승 메달(좌)에서 1964년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메달(우)까지

주 선수는 인천 출신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장창선 선수와의 재미난 일화도 가지고 있다. 나이는 주 선수가 두 살 위이다. 장 선수는 레슬링 경기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발력을 기르기 위해 같은 동네 주 선수에게서 탁구를 배웠다. 주 선수는 ‘눈에서 절대 공을 놓치지 말고 재빨리 따라다니도록 스피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장 선수는 주 동문이 스핀을 먹이고 드라이브를 건 탁구공의 무서운 회전과 속력을 따라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재빠르게 반응하는 몸놀림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주창복은 열악한 환경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대성한 자랑스러운 제고인이다. 제고에 다닐 때 아주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으나 방과 후 탁구 라켓으로 탁구공을 튕기며 강당 체육관 주위를 수도 없이 뛰어 돌던 그를 기억한다.

제고 졸업 후에도 전매청 팀 선수로 활약하며 1965년에는 전국 남자 단식 선수권을 제패했고 당시 국내 탁구계의 제1인자였다. 그는 유명인이 되어서도 나서거나 젠체하지 않던 참되고 성실한 친구였다. 죽음에 임박해 자신의 시신을 의학교육 발전을 위해 기증하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사려가 깊고 참사랑을 실천한 친구, 여기 몇 자 적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뒤늦게나마 그의 명복을 빈다.

이 역시 앞에 인용한 주 선수의 제물포고등학교 동기동창인 태종수 동문의 글 중 앞부분이다. 서두에 말한 바 있는 제물포고등학교의 운동부 운영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방과 후 스스로 운동하는 모습을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주 선수의 스포츠맨다운, 소탈한 인간적인 면모도 느낄 수 있으며, 더불어 친우의 도탑고 진심 어린 추모의 정도 느낄 수 있다.

 

- 1950년대 중반~1960년대 말, 한국 탁구 이끌어

동생 창석을 상대로 피나는 핑퐁 연습을 하고, 또 방과 후 라켓으로 공을 튀기며 학교 강당과 체육관 둘레를 달리면서 체력과 기술을 익힌 자수성가형 스포츠맨!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말까지 십여 년간 아우 주창석과 함께 한국 탁구를 이끌어 온, 최초의 인중·제고 출신 국가대표 스포츠인!

고등학생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이래 주 선수는 수많은 대회에 출전하며 한국 탁구계에서 활약한다. 동료와 후배들과 어울려 훈련하고 대회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1950년대, 60년대 가난하고 낙후했던 이 나라의 희망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주 선수는 실로 우리나라 체육 발전, 탁구 발전의 공로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59년 탁구 명문 경희대에 입학하던 해, 주 선수는 우리나라 남자 탁구 개인 랭킹 4위에 오른다. 1960년도 제5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단식 선수 선발전에서는 5위로 다소 부진한 성적을 내지만, 1961년 10월 전국체전 남자일반부 복식 결승에서는 이달준과 짝을 이루어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어 11월에 열린 제15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석패, 준우승에 머문다. 1963년 17회 대회에서는 준결승에서 패배하고 아우 창석은 단식 준우승에 머문다.

1964년 7월 17일, 9월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대표선수 선발전 첫날 경기에서 주창복, 주창석 형제가 6승 1패로 2위권을 달리고 있다는 보도 이틀 후인 19일 최종 경기 결과 14승 1패의 최승의, 12승 3패의 김충룡에 이어 주창복 선수가 12승 3패, 아우 창석이 11승 4패로 3, 4위를 차지하면서 대표에 선발된다. 1965년 6월 대구에서 개최된 제11회 전국남녀종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주창복 선수가 개인 단식 패권을 다시 잡는다.

 

1964년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주창복(오른쪽 5번째), 주창석(왼쪽 3번째) 형제가 대표로 선발됐다.

 

수많은 경기에 참가하던 중에는 미묘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주 선수와 상대 팀 선수로 나온 아우 창석과의 시합 중 분위기가 다소 과열되어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 물론 우애 깊기로 이름난 형제에게 이런 경우가 있었던 것은 양 팀의 라이벌 의식과 응원하던 팬들의 극성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1966년 6월 16일에 개최된 제20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대회 둘째 날, 남자단체 결승에서 주창복 선수가 소속된 전매청 팀의 4연패를 동생 주창석의 육군 팀이 저지하고 처음으로 종합선수권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발단했다고 한다. 당시 6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실려 있다.

주창복(28, 전매청) 주창석(25, 육군) 형제는 평소에 의가 좋기로 유명한데 이번 대회 단체전에서는 각각 다른 팀 소속으로 출전, 심한 야유까지 서로 퍼부어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 승부의 세계란 이렇게 매정한 것인지.

두 형제가 각각 양 팀 선수로 출전했으나 피차 맞대결은 피했는데 결과는 3대 1로 동생이 소속한 육군 팀이 승리했던 것이다. 신문 기사는 ‘서로 심한 야유까지 퍼부었다.’고 쓰고 있는데 실제로 형제간에 직접 대놓고 그랬다기보다는, 전매청 팀의 4연패를 간절히 염원하는 팬들과 4연패를 저지하고 새로운 패자가 되려는 육군 팀 응원단의 흥분된 분위기에 두 형제도 휩쓸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양 팀 감정이 이렇게 과열된 데에는, 1965년 전년도 대회에서 전매청 팀이 육군 팀을 제물로 우승, 대회 첫 3연패를 이루었던 감정의 앙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 선수는 1970년 은퇴 후, 신흥동 소재 일본식 가옥 옆 목재소에서 부친의 사업을 운영했다. 그 무렵 꼭 한 번, 필자도 주창복 동문을 본 적이 있다. 필자가 군에서 제대한 뒤, 얼마 지난 1973년 초였다.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유도선수 주창옥과 동갑으로 신흥동 한동네에 살아 어려서부터 가까웠는데, 1966년 대학에 들어가 그 친구와 주창옥을 통학 기차 안에서 자주 만나면서 필자도 가깝게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창옥을 보러 목재소를 들렀던 날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려서였지만 주 선수의 아시안게임 출전 사실과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사건’이 인천 사람으로서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생전의 주창복 선수
자유공원에서 딸과 함께한 주창복 선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