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버지의 비애, 오롯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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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아버지의 비애, 오롯이 전한다!
  • 윤세민
  • 승인 2023.09.20 0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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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민의 영화산책] (10) / 치매 영화 '더 파더'
- 윤세민 / 경인여대 영상방송학과 교수. 시인, 평론가, 예술감독
영화 '더 파더'
영화 '더 파더'
<더 파더>는 영화로 연극으로, 서글프고 외로워 보이는 한 치매노인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시대 아버지의 비애까지 오롯이 전하고 있다. 
 

 

차츰 낯설어지고, 잃어버리고, 잊혀저가는 망각의 병, 치매. 언제부터인가 경찰청 안전 안내 문자로, “00에서 실종된(배회하는) 000를 찾는다”는 문구가 자주 오르고 있다. 이 중 70대 이상의 대상자는 주로 치매 환자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치매환자가 급증하는 상황이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2020년 전국 65세 이상 치매추정환자는 약 84만 명으로 10명당 1명꼴이다. 이 추세라면 2030년에는 치매환자가 136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치매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웃, 우리 가족,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만큼 요즘 영화의 주요 소재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스틸 앨리스> <어웨이 프롬 허> <내일의 기억> <소중한 사람> <아무르> 등의 해외영화들, 그리고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그대를 사랑합니다> <장수상회> <깡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로망> 등의 국내영화들이 이 ‘치매’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치매 영화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수작으로 꼽히는 영화가 바로 <더 파더>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더 파더>

‘아버지’는 운명적인 이름이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에게서 나서 아버지(어머니)가 되고 아버지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한때는 가장 강력했고 가장 친근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차츰 허물어지고 점차 낯설어진다.

<더 파더>는 그런 아버지를 그린다. 사람은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기대하기에 오늘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추억할 과거가 사라지고, 기대할 미래가 없어져 가는 아버지. 망연자실이요 비참함이다. 그러나 질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무너져 내리는 기억 끝을 붙잡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아버지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고자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는 다시금 강력해지고 또한 따뜻해진다.

프랑스 최고의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희곡으로 2012년에 초연된 연극 <더 파더>(Le Pere/아버지)는 프랑스 몰리에르상,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 미국 토니상 등 세계 최고 권위의 공연상을 휩쓸었다. 그만큼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이어서 작가가 감독으로 직접 나선 동명 영화 <더 파더>(2020)는 최고의 연기파 배우 안서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맨의 품격 있는 연기 앙상블 속에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와 제74회 영국 아카데미에서 동시에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받으며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치매 아버지의 ‘시계’와 ‘집’,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집착

치매를 다룬 영화들이 치매를 가족 또는 타인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일반인데 비해, 영화 <더 파더>는 직접적으로 치매 환자의 시각에서 집중 조명하고 있다. 더욱이 스릴러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에, 그만큼 더욱 괴이하고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런던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80대 초반의 ‘안소니’(안서니 홉킨스).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서 안소니를 찾아오는 건 딸 ‘앤’(올리비아 콜맨)뿐이다. 그러던 와중 앤이 갑작스럽게 런던을 떠나 파리로 간다고 한다. 그 순간부터 앤이 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안소니. ‘잠깐, 앤이 내 딸이 맞기는 한 걸까?’ 기억이 뒤섞여 갈수록, 지금 이 현실과 사랑하는 딸, 그리고 앤의 남편이라고 혹은 애인이라고 자처하는 낯선 남자들, 또 자신을 돌본다고 드나드는 간병인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마침내 안소니 자신마저도 점점 의심스러워지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극중에서 안소니는 특히 ‘시계’와 ‘집에 과할 정도로 집착한다. 안소니는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다. 과거에 둘째 딸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 가족과 보냈던 시간에 미련을 가지고 그 기억들을 보내주지 못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시간들을 붙잡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인식 체계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지한 그에게 이제 단 하나 믿을 것은 오직 시계뿐이다. 그래서 그는 시계가 없어질 때마다 불안해하고 더욱 시계와 시간에 집착한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시간마저 놓쳐버리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따라서 안소니의 시계 집착은 시간과 추억의 망각을 헤쳐 나오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또한 안소니는 ‘집’에도 계속 집착한다. 혹시라도 딸 앤이 자신의 집을 탐하는 게 아닌가 의심까지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게 집이란 오페라 음악을 들으면서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안식의 공간이다. 동시에 그의 집은 아내와 두 딸을 지켜냈던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에게서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안위 및 아버지로서의 위치와 존엄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안소니의 집에 대한 집착은 그의 삶과 기억의 공간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숭고한 몸부림인 것이다.

 

연극 '더 파더'
연극 '더 파더'

 

전무송 주연의 연극 <더 파더>가 전하는 아버지의 비애

때맞춰 <더 파더>가 우리나라에서 연극으로 공연(9.19~10.1,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안소니 홉킨스를 대신해 한국 연극 무대에선 거장의 경지에 이른 명품배우 전무송이 아버지로 나선다. 또 만만찮은 연기 관록을 지닌 친딸 전현아 배우가 극중의 딸로 등장한다. 닮은 듯 다른 듯 배우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부녀가 오랜 기간 합을 맞춰온 만큼 이들이 같은 무대에서 선보이는 연기 스펙트럼과 앙상블은 특별한 관람 포인트가 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이강선 연출 아래 탄탄한 연기력의 양동탁, 정연심, 심연화 배우, 그리고 경력 15년 이상의 전문 스탭진이 매혹적인 무대를 선사한다.

연극 <더 파더>는 오리지널 희곡에 충실하는 한편, 기억을 잃어가는 한 인물의 비극성과 함께 일상의 변화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끝 모를 불안감을, 독창적인 장면 해석과 독특한 이미지 연출로 그려내고 있다.

예의 아버지의 시계에 대한 집착은 아프지만 살갑게 다가오고 있고, 집에 대한 집착은 가느다란 철제 기둥으로 단순화 한 무대 공간 속에서 더욱 애처롭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주인공의 시점으로 극이 진행되기에, 서글프고 외로워 보이는 한 치매노인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시대 아버지의 비애까지 오롯이 전하고 있다.

이 가을에 희곡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치매노인 아버지’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새롭게 치매노인과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타인과 자신에게도 더욱 너그러운 마음과 시선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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