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서구 당하동 나진포천 일대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가을 노래가 반가운 요즘이다. 절기가 바뀌며 완연히 달라지는 계절 기운을 찾는 재미가 크다. 하지만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으로 인해 가을날의 평온함을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다. 중동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충돌로 이미 많은 사상자가 기록되었다. 계획적 피해에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마저 든다. 강물이 제방을 넘지 않고 굽이쳐 흐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비하고 조심하며 살 일이지만 앞날을 알 수 없으니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지구 나라에 더 이상의 사상자가 없기를 바란다. 갑갑함을 안은 채로 인근 천변 산책로에서 가을에 노크한다.
인천지하철 2호선 (독정역-완정역) 사이는 나진포천(羅津浦川)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나진포천은 서구의 4대 하천 중 하나다. 서구 당하동에서 시작해 마전동, 불로대곡동, 김포 감정동을 거쳐 계양천과 합류 후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그 첫 구간이 당하동 구간이다. 그저 냇물 정도의 흐름이 있지만 인근 주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물길이자 산책로이다. 반려동물과의 나들이, 어르신들의 가벼운 산책과 운동, 독정역과 완정역 사이를 오가는 통행길이기도 한, 좁지만 밀도 높은 구간인 셈이다. 시작점에는 항일독립운동 기념비 광장이 조성되어 지역의 독립 정신을 드높이고 있었다. 최근 깔끔하게 잡풀 정리가 되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천변을 따라 걷는다. 길 폭이 좁지만, 지하 자연통로를 걷는 것처럼 기분만은 상쾌했다. 풍경이 오밀조밀하고 가을 날씨와 더불어 알싸함도 조금 전해지니 말이다. 과하지 않은 단정함이 있어 좋다. 또한 하천의 곡선을 그대로 살려서인지 수초들과 함께 풍성하게 들어찬 느낌을 받았다. 유아차를 몰며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모습도 달콤하게 익어간다. 조금 지나면 단지 내 수목들도 울긋불긋 물들어 하천길은 보다 풍성해질 것이다.
완정역에 가까워질수록 수로는 넓어진다. 위에는 다리도 있고 벽화 구간도 있다. 당하동 주민자치위원회의 노력으로 회색 담벼락이 산뜻하게 변모했다. 반 고흐의 작품과 더불어 유쾌한 꽃밭을 거닐 수 있었다. 완정역 사거리에서 수로는 잠시 지하로 잠기기에 더 이상 걷지는 못한다. 당하동 구간은 일명 맛보기 구간이다. 마전동으로 올라가면 좀 더 넓고 쾌적한 구간을 걷고 자전거로도 달릴 수 있는 구간이 아쉽지 않게 이어진다.
완정역에는 당하제1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당하동 행정복지센터가 제법 큰 규모로 있고 그 옆으로는 곧 지어진다는 경찰서 터가 있다. 이 일대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서쪽으로는 탑병원이 크게 자리하고 있고 1998년 지어진 당하탑스빌아파트는 동네의 터줏대감이다. 근린공원 안의 어린이 놀이터는 여름이면 물놀이장으로 바뀌니 여름에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매미 음과 견줄 만도 했을 법하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걸까? 그저 평온한 일상의 풍경에 비해 분쟁지역 걱정이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완정역 1번 출구 뒤 야외 마당에서는 평일 저녁 7시만 되면 ‘야호 체조 & 댄스’가 열려 저녁의 색채를 더한다. 최근 주말에는 ‘당하 나진포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동네 모든 사람이 외출한 상황 같아 당황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다. 마스크는 물론 거리두기조차 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일상적 풍경에 왜 그리 특별하게 감동해야만 했는지 알 것이다. 요즘 동 축제는 주민총회를 곁들여서 하는 것 같은데 총회 안건은 무엇인지도 궁금해진다. 추억의 솜사탕 아저씨가 사탕 구름을 연신 하늘로 날리고 있었다.
나진포천은 10km가 넘는 긴 하천이다. 특히 교통 하천길인 5호선 연장 노선 결정으로 인천시와 김포시의 이견이 팽팽해 시끄럽기도 한 요즘이다. 길 하나가 미래를 좌우하고, 하천 하나가 키워내는 생명이 많다. 뭐니 뭐니 해도 각자의 마음에 물길 하나,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정거장 몇 개 정도는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다. 나진포천을 걸으며 새삼 신기했던 점은 작은 물길이 큰 강으로 흐르는 자연의 순리를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로가 잘못이겠지만 팔레스타인 구역에 전기와 수도를 끊은 행위는 우리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공수표 같지만, 부디 좋은 날씨에 잔칫날 같은 총회의 시간을 도모하는 가을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