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 정보통신망의 기초를 쌓은 棟梁之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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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한국 정보통신망의 기초를 쌓은 棟梁之材
  • 김윤식
  • 승인 2023.10.3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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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9) 체신부 장관을 역임한 김성진
- 김윤식 /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인천in이 이달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김성진 전 장관
김성진 전 체신부, 과기처 장관

 

육사의 상징적 존재, 김성진

일제 때 인천중학교에서 재학 5년간 전교 수석을 차지한 수재로서 방희 동문이 있었다면, 졸업 후 상급학교에 진학해 전교 수석을 차지한 동문도 있다. 그가 바로 인천중학교 6년제 제4회 졸업생 김성진(金聖鎭 1931~2005)으로, 광복 후 대한민국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수석 입학은 물론 4년간 학업 성적 일등을 독차지했던 수재다.

김성진은 중고교 과정이 통합된 6년제 인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1951년 10월 30일, 6․25한국전쟁 발발로 휴교했다가 경남 진해에서 문을 연 육사에 합격하여 이듬해 1952년 1월 20일에 제11기 생도로 입학했다.

당시 육사의 모집 정원은 200명이었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응시자가 1천4백여 명에 달해 대략 7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였다. 그러나 김성진은 당당히 수석으로 합격한 후, 1955년 10월 졸업 때까지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이처럼 뛰어난 학업성적과 든든한 리더십으로 생도대장까지 지낸 김성진은 당시 ‘육사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육사 수석졸업 대표화랑으로 이름이 새겨진 김성진(1992. 1. 29. 조선일보)
육사 수석졸업 대표화랑으로 이름이 새겨진 김성진(1992. 1. 29. 조선일보)

 

김성진과 전두환

이때부터 전두환의 전도는 글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여기에다 그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킨 것이 69년 4월에 있었던 11기 이후의 정규 졸업생 동창회인 '北極星會'의 회장 피선이었다. 당시의 회장은 육사의 상징적인 존재이던 金聖鎭이었다. 인천중을 졸업한 그는 입학시험부터 졸업 때까지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던 김성진 중령과의 대의원 표결에서 수경사 30대대장이던 전두환 중령이 이겼던 것이다.

1990년 4월 8일, <시사저널>에 실린 천금성 작가의 「정치 때문에 40년 친구를 잃었다」는 글의 일부분이다. 육사의 상징 김성진과, 생도 시절 여러 면에서 뒤처져 있던 11기 동기생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하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먼저 밝혀 둘 것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 11기에 대해서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회’라는 군 내 조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에 어떤 군 장교가 속해 있나 하는 궁금증일 것이다. 밝힐 것이 바로 김성진의 가입 여부인데, 김성진은 동기생 전두환, 노태우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비밀 사조직 ‘하나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김성진이 생도 시절, ‘육사의 심벌’로 공인되었었다는 기록은 2018년 7월호 <월간조선> ‘김태완의 인간탐험’ 대담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실제 이 기사의 대상 인물은 조순 전 부총리였는데, 조 전 부총리가 1952년에서 1957년까지 육사에서 영어교수로 있었던 시절의 회고담 중에 11기 생도 중 김성진의 뛰어난 두뇌에 대한 칭찬의 내용 속에 나오는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적는다.

—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1952~1957년) 영어를 직접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육사 11기생들을 만난 것이죠?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그 양반들하고 아주 친했습니다. 잘 지냈습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없었어요. 4년 정도 차이였으니까 형제나 비슷했지요.”

당시 육사 11기, 12기 생도들은 대체로 1932년생이 많았다. 조순 부총리는 1928년생이니 4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셈이다. 육사 11기생들은 첫 정규 육사 졸업생이었다. 이 기수는 2명의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을 포함, 6명의 장관(정호용․이상훈․이기․김식․김성진․김영균), 다수의 고위 장성(김복동․최성택․최연식 등)을 배출했다.

— 11기생 중 가장 특출한 학생은 누구였나요?

“아주 머리 좋은 이가 한 명 있었어요. 김성진이라고 특출하게 공부를 잘했고 학생부대장도 했지요. 전두환 대통령도 나한테 그랬어요. '(김)성진이는 보통 대우를 해선 안 됩니다. 육사의 심벌(상징) 아닙니까?’ 그랬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전두환 장군이 1979년 12․12를 일으키던 날 저녁, 김성진이 하고 식사를 같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육사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던 김성진은 5공 당시 안기부차장과 체신부 장관,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출중했던 실력

김성진은 이럴 만큼 출중했던, 육사의 상징 인물이었다. 어학, 수학 과목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고, 지덕체(智德體) 중의 ‘體’ 능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고 동기생들 모두 입을 모아 칭찬했다고 한다.

육사 졸업을 앞두고 생도들은 자기들이 통산 ‘육사 11기’로 불리는 데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10기까지는 4년제가 아닌 속성이어서 수학, 훈련 기간이 불과 몇 달로 짧은 데 비해 자기들은 정규 대학과 같은 4년간에 학업과 훈련을 마쳤기 때문에 정규 육사 1기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자기들 11기가 ‘4년제 학업과 훈련을 마친 정규 1기인가, 아니면 통산 11기인가 하는 문제로 설왕설래할 때, 김성진이 동기생들을 대표하는 연대장 생도로서 다른 생도 한 명을 대동하고 육군참모총장을 면회해 그 뜻을 표했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는지 기수 호칭은 ’육사11기‘로 공칭(公稱)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리더로서 나선 사례가 김성진이 인천중학교 2학년 재학 시절에도 있었다. 2005년 2월에 발간된 『길영희 선생 추모문집』 제6개정에 수록된 그의 「길 교장 님의 욕심」이란 글 중에 나온다. 여기서 스승 길 교장 선생님의 칭찬 말씀 중에서 김성진의 분명한 판단과 그에 따라 용기 있게 행동하는 품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이다.

내가 아는 길 선생님의 가장 큰 욕심은 ‘사람 욕심’이다. 미인을 사랑하고 재능을 사랑하고 똑똑하고 성실한 제자들을 사랑하고 심지어는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를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하고 아끼신 것이야말로 나는 吉 교장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고 생각한다. 동맹휴학이 있던 다음날 선생님 댁에 불려갔더니 “그 많은 사람들이 다 하자고 떠드는 속에서 네가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참으로 기특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 용기를 잃지 말고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고 칭찬하시더니 “그러나 그 많은 학생들을 움직여서 스트라이크를 결정하게 한 그 친구도 정말 멋있는 인물이다. 대성할 수 잇는 그릇이야.” 하며 좋아하시던 모습도 중학교 2학년생의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김성진이 오히려 은사 길 교장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이어서 여기에(이 글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나, 내용을 통해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느낄 수 있는 소득이 있다. 이런 스승 밑에서 공부한 덕에 그가 육사에서 우수한 학업 성적을 이루어 내고, 생도대장이란 중책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써가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방희, 김성진 두 수재 동문이 다 인천중학교를 나와 똑같이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해 다시 한 번 선후배가 되어 똑같이 군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이다.

 

조용한 학자풍, 치밀한 성격

그리하여 선배 한 사람은 후일 소장으로 예편한 뒤 외교관으로 국가에 공헌하고, 다른 후배 한 사람은 국내외 대학에서 더욱 학업을 쌓은 후 준장으로 군문 나와 내각의 장관으로서, 또 국가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책임자로서 헌신한다.

실로 인천중학교는 동량지재(棟梁之材)를 길러 내었고, 국가는 적소에 그들 재목을 골라 썼다는 생각이다.

김성진은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한다. 그 무렵 아마 그의 우수한 두뇌를 훌륭한 후배 장교를 양성하는 교수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당국의 목적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적을 둔다. 그리고 1959년 서울대 수료와 동시에 이내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용되는 것이다.

학구파 김성진은 육사 교관 재직 중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 유학하여 물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1964년이다. 그 같이 워낙 뛰어나고 유연한 수재의 두뇌는 ‘사학’이라는 순수 인문학에서 이내 방향을 바꾸어 자연과학 ‘물리학’ 공부가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는 1966년까지 육사 교관을 지낸다.

1970년 중령 시절에는 다시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샌드위치 판의 대칭 및 비대칭 왜곡』이란 논문 주제로 기계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되면서 김성진은 군 내 핵심 엘리트 장교로서 국방과학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김성진은 3년 동안 연구자의 길에서 벗어나 잠시 '외도'를 한다. 주미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방과학 연구에 종사하던 사람을 외교관 분야인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으로 발탁한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결국 3년 근무를 마친 1976년, 다시 국방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복귀한다.

1980년 5월 김성진은 준장으로 육군에서 예편한 후,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을 시작으로, 제1차장, 제2차장을 두루 지낸다.

1982년에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승진해 직을 수행하다가 1983년 10월 15일 개각 당시, 제33대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한다. 군 출신이었지만, ‘조용한 학자풍에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향후 국가 발전의 발판이 될 정보 통신 분야의 적임자로 낙점되었던 듯하다.

 

1983년 제33대 체신부 장관 발령장 수여
1983년 제33대 체신부 장관 발령장 수여

 

정보통신 시대의 초석을 놓다

장관 취임 직후 ‘국가 통신 발전 중장기 계획 수립, 통신 사업의 비전을 제시’하여 으로써(제시함으로써) 닥쳐올 정보통신 시대의 초석을 놓은 사실이 그 증거라 할 것이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대비해 TV 중계 수요와 더불어 원활한 통신을 지원하기 위한 위성통신 지구국 설치 등의 당면한 국가사업을 앞에 둔 상황임에 더욱 그런 판단을 하게 된다.

체신부장관 재임 시 뒷이야기 한 가지. 김성진 장관은 각 지방청과 산하 우체국, 중계소 등을 순시하면서 역대 장관들과 달리 국장들의 수행 관행을 금지시키고, 수행원 단 한 명만 대동했다고 한다. 국장들이 굳이 장관을 수행함으로써 바쁜 본부의 업무를 미룰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체신부 장관 시절 그는 대통령 특사로 코트디브와르, 가봉, 자이레 등 아프리카 3국을 순방한 일도 있다. 당사국 간의 우호증진과 경제협력을 위한 순방으로 알려졌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1985년 7월 말에 있었던 과학기술처 장관으로서 프랑스, 서독, 스웨덴, 자유중국(대만)을 순방하면서 과학기술 협력 관계를 협의하고 귀국한 사실을 먼저 기록한다.

1985년 2월에 있은 개각에서 김성진은 제6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체신부 소관 정보 통신 분야 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 과학 기술 전반에 대한 혁신과 발전을 이루려는 정부의 결정이었다.

취임 직후 과기처 당면 업무로서 제기한 ‘2천년까지 과학기술투자를 GNP 대비 3%까지 끌어올리고 핵심 과학 기술 두뇌 15만 명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혁신촉진법」 제정 준비’ 등 고도기술 개발 기반 확충을 꾀한 것이 그것이다.

김성진은 과기처 장관을 물러나 1986년 5월 한국과학재단 4대 이사장을 지낸 다. 이어 1987년 2월에는 한국전산원 창립과 동시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시급한 국가 전산망 기술 체계를 마련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전산화 실상은 무질서와 비효율의 표본이었다. 정부 부처는 부처 단위대로, 민간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각기 개별적인 전산화를 이루고 있어 투자 중복은 물론, 표준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까닭에 호환 문제, 자료 활용의 제약 등, 여러 난제가 놓여 있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이미 1983년에 계획되었으나, 한국전산원 개원에 맞춰 그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이다.

2012년 9월 17일자 전자신문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특히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을 빨리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한 바탕이면서 이 사업이 축적해 놓은 인프라와 마인드 효과가 그만큼 컸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사무실 현판식. 왼쪽이 김성진 위원장.(1991년 6월 1일 조선일보)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사무실 현판식. 왼쪽이 김성진 위원장.(1991년 6월 1일 조선일보)
(좌)과학재단 이사장 선임기사(1986.5.15), (우)한국전산원장 동정 기사(1992.6.3)

 

이밖에도 그는 1987년부터 스웨덴 공학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경제과학 분과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91년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직과 1992년에는 한국전산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2월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1984년 4월 동아일보는 자천 타천 후보 하마평을 실으며 당시 인천의 지역구였던 인천동·․북구 출마 예상자 중의 한 사람으로 김성진의 이름을 게재하기도 했었다.

앞의(앞에 서술한) 인터뷰 기사에서 조순 전 부총리가 아쉬워한 대로, 김성진은 2005년 2월 11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단정하고 치밀한 성품에 박사학위를 소지한 군 장성 출신 학자로서 바둑과 독서를 취미로 했으며, 태권도 유단자급의 실력도 가졌었다고 한다.

상훈으로는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벨기에 대십자훈장, 체육훈장 맹호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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