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국어 대사전 만든 김흥규 교수 – 이현식 / 문학평론가
국어사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숨 쉬며 살아가는 데에 공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공기가 없다면 우리는 채 1분도 편안하게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어가 공기만큼 중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에게 언어가 사라지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인간 사회는 순식간에 무질서와 혼란으로 단 하루도 문명을 평온하게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렇듯 언어는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유지하는 데에 공기처럼 중요한 존재이다. 더구나 우리에게 한국어라는 말과 글은 우리 문화의 가장 저변을 이루는 기초이자 자산이다.
국어사전은 우리말과 글의 낱말을 모두 모아 놓은 책이다. 요컨대 국어사전은 우리말의 보고(寶庫)이다. 한국어의 낱말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과 용례 등을 설명한 책인 것이다. 조선어학회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제 식민지시기부터 사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사전은 모든 언어생활의 기초를 이룬다. 새로 만들어지는 언어도 과거에 쓰였던 단어도 사전에 등재되어 그 표준적인 뜻과 쓰임새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전은 제대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그 과정도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챗GPT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이제 언어 자체가 디지털 정보로 전환되고 AI가 도래하는 시대에 사전의 중요성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대화형 AI에게 사전에 기반한 정확한 언어구사는 필수적 요소이다.
문학연구자가 사전을 만들다
조선어학회에서 1947년 '우리말 큰 사전'을 낸 이후 민간에서 제대로 된 연구를 통해 편찬한 최초의 사전이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2009)이다. 장장 17년에 걸쳐 350명의 연구진이 참여하여 만든 이 사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어사전으로 국립국어원의 표준 국어대사전(1999)과 함께 포털사이트인 ‘NAVER’와 ‘다음’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사전 편찬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사람이 언어학자나 국어학자가 아니라 문학연구자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김흥규 명예교수이다. 김흥규 교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전 시가(詩歌) 연구자이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면서 한국 현대시를 거쳐 우리나라 고전문학을 연구한 정통 문학연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김흥규 교수 같은 문학연구자가 아니었다면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은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문 규정을 중시하는 국립국어원의 표준 국어대사전에 비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말에 기반한 용례 중심의 사전인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은 한국어의 자산과 가치를 한층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어는 규범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생활에서 사용하는 입말도 중요하다. 생활언어가 규범을 모두 따라가지는 않는다. ‘멘붕’이니 ‘내로남불’이니 하는 말은 규범어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은 규범보다는 실제 사용되는 언어, 용례 중심의 편찬 방침을 정하고 끈질기게 조사하고 연구한 끝에 과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문학연구자로서 김흥규 교수의 신념이 녹아있다.
약 1억 어절 규모의 언어 자원을 모아 여기에서 표제어를 추출하고 계통을 따라 분류하는 등, 편찬 과정의 어려움이나 사전 연구 분야의 전문적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김흥규 교수가 1993년 몇몇 교수들과 함께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부터 시작해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2009년 최종 성과를 간행하기까지 그의 열정이 계속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은 기억되어야 한다.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은 한 개인이나 대학을 넘어서 우리 공동체 전체, 우리 시대 한국어 자산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어낸 것이다.
문학도의 길을 걷다
김흥규 교수는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나 축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인천중학교에 입학해 제물포고등학교를 10회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쓰고 문학서를 즐겨 읽었던 그가 전공을 국문학으로 선택해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문예반 시절 그는 김봉신(전 나래피오 가구 사장),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역임), 신상철(전 한샘출판사 사장), 조남현(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등의 문우들과 어울리며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최승렬 선생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최승렬 선생은 시인 신석정과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당시 길영희 교장선생께서 전주에서 교사로 일하시던 분을 거의 납치하다시피 해 모셔온 분이었다. 국어교사이자 문예반 지도교사로 학생들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쳤던 최승렬 선생 아래에서 학생 김흥규는 시를 읽고 쓰는 일에 매력을 느낀다.
고교 시절에 함께 문학도로서 꿈을 꿨던 친구들, 그 꿈을 잘 키워줬던 최승렬 선생, 그리고 열정적 이상주의자였던 길영희 교장의 영향 아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진학해 본격적인 문학도로서의 길을 걷는다. 대학에서는 「성탄제」를 쓴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김종길 교수의 강의를 즐겨들으며 때로는 시인으로, 때로는 문학평론가의 꿈을 꾼다. 그의 꿈은 대학 4학년 때 마침내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이라는 결실을 맺는다.
23세의 나이에 평론가의 꿈을 이룬 김흥규는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문학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다.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시와 현대비평에 관심을 두어 본격적인 공부를 하고 그 결과를 「최재서(崔載瑞) 연구」라는 석사논문으로 제출한다. 그의 석사논문은 50년이 지나간 현재에도 여전히 최재서라는 문학평론가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참조해야 할 책으로 꼽힐 만큼 국문학계의 중요 저작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문학 연구는 그 안에서 현대문학과 고전문학으로 전공이 구분되고 이 둘은 거의 다른 분야처럼 인식될 정도로 영역 구분이 뚜렷한 편이다. 즉, 현대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전공을 바꾸지 않고 해당 분야의 공부를 이어나가고 고전문학 분야도 마찬가지로 석사과정 때 고전문학을 전공하면 박사과정에 진학해서도 전공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김흥규 교수는 이례적으로 석사과정에서는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시와 비평을 연구하다가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는 고전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국문학계에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하는데, 김흥규 교수 스스로는 현대시나 비평사의 문제를 탐색하다가 이런 것들이 조선시대의 문학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석사를 마치고 1976년 대구 계명대학교의 전임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고려대학교 박사과정에 진학해 고전문학 연구자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다. 3년간의 대구 생활을 마치고 1979년 모교인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로 자리를 옮긴 이후 고전 시가 연구로 나아갈 무렵, 이제껏 평론가로 활동한 성과를 문학과 역사적 인간(1980)이라는 평론집으로 내놓으면서 한 매듭을 짓게 된다.
컴퓨터, 새로운 발견
그런데 김흥규 교수가 국어사전과 연을 맺게 되는 것은 그가 전공을 바꿔 고전문학을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은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전문학에서도 관심을 둔 분야가 시의 운율론, 즉 시가 지니고 있는 정형화된 리듬 같은 것을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시마다 발견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저마다의 운율을 보다 체계적으로 살피고 계량화해서 통계를 추출하면 뭔가 기존 연구와는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김흥규 교수가 시의 운율을 조사하고 통계를 내려고 시작한 일은 어휘를 모으고 계량화하는 쪽으로도 관심이 확장되었는데, 198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민족문화연구원의 전신)의 ‘중한(中韓)사전 편찬실’ 부실장 일을 맡게 된 것도 부차적 요인이 되었다. 인문학 전공자이면서도 정보처리 방법론과 통계 등에 관심이 많던 그는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면서 어휘 편찬 문제에 눈을 뜨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국어사전의 필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의 눈에 띈 것이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계였다. 이 대목에서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198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도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내가 우리 애들에게 사줄 겸 해서 컴퓨터를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애플컴퓨터를 샀어요. 1984~1985년 무렵이었는데, 그런데 애들은 게임만 하고 나는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는 데 재미를 붙여서 그걸로 자료를 처리하는 일까지 했어요. 그렇게 컴퓨터에 입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1986년에 미국에 1년 갔다 와서 애플을 아이비엠 피시로 바꾸고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거죠.
따져보면 시 작품의 형식이나 운율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분석하면 굉장히 유용할 것 같으니 우선 컴퓨터를 좀 알아야 되겠다는 동기로 제가 컴퓨터와 친해진 것이죠. 그렇게 시작해서 결국 문학도로서 문학 텍스트를 전산화하고, 분석하고, 이리저리 가공하는 일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이른바 컴퓨터 도사(?)였던 그는 사전 편찬 작업에 컴퓨터가 매우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후 언어학, 국어학 전공 교수들과 언어연구를 전산(電算)과 연계시키는 고민을 함께하는 모임이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그러나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많은 연구진들이 참여하는 방대한 작업이고 어휘의 수집, 조사 분류 등을 하려면 비용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익을 많이 내는 영리성 연구도 아닌 터에 사전 편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때 김흥규 교수와 동기이자 고교 시절 같은 문학청년이었던 신상철 사장의 도움을 이끌어내게 된다.
우리 모임의 교수들은 이런 새삼스러운 요구 앞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심하고 또 한탄했다. 그러면서 1993년 봄이 저물어 갈 무렵 이 난제를 풀 만한 가능성이 얼핏 내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국어교육 분야의 출판사로 명성이 높던 한샘출판사를 재정적 동반자로 삼는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었다. 우리 모임의 교수들은 이에 대해 적극 찬성하고, 나에게 그 구체적 추진을 맡겼다. 도서출판 한샘의 서한샘 회장과 신상철 사장은 서울사대 국어교육과의 선후배간인데, 모두 인천 출신으로서 역시 인천 사람인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신상철 사장은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자, 고교 2학년 문예반 시절 이래 문학도의 꿈을 함께 키우며 살아 온 평생의 벗이었다. 서한샘 회장은 나보다 조금 연상이었는데 1980년대 후반에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라는 내 책을 한샘에서 낸 이래 출판사 경영인과 저자로서, 또 인천 출신의 선후배로서 두터운 교분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1993년 1학기 후반 쯤 나는 신상철 사장을 만나 한국어 말뭉치 구축과 이에 기반한 국어사전 편찬 사업안을 전달하고, 그 개요를 설명했다. 그는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하고, 일단 서 회장께 보고해서 의견을 구한 뒤 회답을 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수일 뒤 응답이 왔다. 한샘은 이 사업의 교육적, 학문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고려대 연구팀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여, 기획안대로 5년간 10억 원을 투자하며 동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우리 연구팀은 한샘의 서 회장, 신 사장과 만찬을 함께 하며 새로운 국어사전 편찬의 미래를 자축하고 흥겨운 담소와 통음(痛飮)을 함께했다.
그런데 한샘출판사의 도움으로 사전 편찬을 시작했지만 경영악화에 IMF 사태까지 맞아 재정지원이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김흥규 교수는 그 시절 사전 편찬 작업을 함께하던 열정적 연구진 인원을 반으로 줄여서 구조조정을 해야 했던 것이 가장 힘들었던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10년여를 고심참담하며 편찬 작업을 지속한 결과 김흥규 교수는 마침내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의 자격으로 2009년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서문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김흥규 교수는 천상 문학연구자여서 한국어 사전 편찬을 마무리한 이후에는 당시까지 수집된 우리 고시조 전체, 약 46,000여 수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책으로 집성하는 큰 과업을 이룬다. 고시조 대전이 그것인데, 이는 한국 시가문학의 대표 장르인 옛시조 전체를 디지털로 전환하여 편찬한 것으로, 김흥규 교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리하여 시조가 종이에 적힌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 살아나는 기틀을 다진 것이다.
2012년 고려대에서 정년으로 퇴임한 이후에는, 2015년에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연세대학교 설립자인 용재 백낙준 선생을 기념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최고의 학자에게 부여하는 명예직)가 되어 1년간 연세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기도 했다.
문학연구자이면서도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편찬을 주도하고 고전 시가 연구의 기초를 다진 그의 업적은 요즘처럼 한류와 K콘텐츠가 각광받는 시절에 우리 문화의 밑바탕을 튼튼히 다졌다는 점에서 다시금 주목되어야 한다. 더구나 그가 인천의 품 안에서 성장하며 문학도로서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어 우리 공동체를 문화적으로 풍성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것은 인천 시민들이 함께 자랑으로 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