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익고인돌, 당당히 살아남아 청동기시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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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익고인돌, 당당히 살아남아 청동기시대를 말하다
  • 최혜경 객원기자
  • 승인 2023.12.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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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속으로]
(10) 학익고인돌(Ⅰ),(Ⅱ)
인천in이 인천시립박물관과 협력하여 본관 및 분관 소장 유물들을 탐사하고 독자 시민들에게 소개합니다. 인천의 역사 문화를 대표하는 박물관 속 유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떤 유래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아보며 지역 역사 문화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학익고인돌1 정면
인천시립박물관 뒷 마당에 전시된 학익고인돌Ⅰ

 

학익고인돌Ⅰ

인천시립박물관(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뒤편, 작은 언덕에 마련된 야외전시장에 자리 잡은 고인돌이다. 학익고인돌은 문학산 부근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1995년 11월 14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0㎝ 내외의 고임돌 위에 부정형한 타원형의 덮개돌을 덮은 탁자식 구조다. 덮개돌의 길이는 280cm, 너비는 169cm, 지상높이는 92cm다. 고임돌의 한쪽은 1개의 판석(판판하고 넓은 돌)으로 되어 있고, 반대쪽의 고임돌은 2개의 괴석(크기가 작은 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과 후면의 막음돌은 없다.

판(板) 모양의 돌로 만들어진 무덤방 내부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조각과 돌화살촉(石鏃), 돌칼(石刀)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출토된 학익고인돌의 유물과 발굴 현장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1927년 학익고인돌 발굴 모습 출처 국립중앙박물관(박물관 풍경 2023 59호 재인용)
1927년 학익고인돌 발굴 모습 출처 국립중앙박물관(박물관 풍경 2023 59호 재인용)
청동기시대 유물
청동기 시대 유물 - 바퀴날도끼, 돌칼, 화살촉, 돌창(인천시립박물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 고인돌

고인돌은 돌널무덤과 함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이다. 고인돌은 지상에 큰 덮개돌이 드러나 있고 그 밑에 고임돌(支石)과 무덤방(墓室)이 자리하는 구조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탁자식(卓子式=북방식), 기반식(基盤式=남방식), 개석식(蓋石式) 등으로 구분된다.

탁자식 고인돌 또는 북방식 고인돌은 굄돌을 세우고 그 위에 편형한 돌덮개를 얹은 형태이다. 기반식 고인돌(바둑판식 고인돌)은 판돌, 깬돌, 자연석 등으로 쌓은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받침돌을 놓은 뒤,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형태이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바로 뚜껑을 덮은 형태이다. 고인돌이라는 명칭은 덮개돌 아래에 돌을 괴는 형태에서 비롯한 것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되었지만 일부는 집단의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이나 기념물로도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돌의 축조(築造)는 다수의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대규모의 고인돌은 집단 내에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지닌 지배층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고인돌은 유럽·인도·동남아시아·일본 큐슈·중국 동북지역 등 전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4만여 기가 확인되고 있다.

 

옥련동 인천시립박물관에 오기까지

학익고인돌I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발견됐다.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진행되었다. 1933년에 편찬된 『인천부사』에 발굴자는 조선총독부박물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와 사와 준치이(澤俊一)이고, 날짜는 소화(昭和) 27년(1927) 11월 27일로 기록돼 있다. 이어 1929년 경성대학에서 학익동 고인돌 8기를 더 확인하였는데, 이곳의 고인돌 무리는 1938년 일대에 인천소년형무소(현재 인천구치소, 인천지방법원과 검찰청)가 들어서며 사라져 버리고 서쪽 구릉에 1기만이 남았다. 이것이 인천시립박물관 뒷마당의 학익고인돌I이다.

(구)인천구치소 부근에 남아 있던 학익고인돌I은 1971년 소년교도소를 확장하며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내 옛 인천시립박물관(제물포구락부)으로 옮겼다가 1990년 시립박물관이 연수구 옥련동 현 위치로 이전함에 따라 이 곳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학익고인돌이 학익동을 떠나 연수구 옥련동에서 자리 잡게 된 연유다.

 

인천 소년형무소 담장 부근에 있었던 학익동 고인돌 I (출처 화도진도서관이 소장 최성연선생님 사진 네이버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인천 소년형무소 담장 부근에 있었던 학익동 고인돌 I (출처 화도진도서관이 소장 최성연선생님 사진 네이버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학익고인돌II

인천시립박물관 우현마당에 있는 학익고인돌 II는 비교적 최근인 1998년 당시 인천구치소 내 인천지방법원 신축공사 때 발견되어 옮겨온 것이다. 고인돌은 덮개돌 1개와 받침돌 4개로 구성되었고, 막음돌은 남아 있지 않다. 고인돌의 전체 높이는 60cm이며, 덮개돌은 길이200cm, 너비는 175cm, 두께는 30cm이다. 학익고인돌 II는 발견 시기가 늦어서인지 수습된 유물은 전혀 없다. 원래는 문학산 인근에 여러 기의 고인돌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본래의 위치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인천시립박물관 우현마당에 전시된 학익고인돌Ⅱ
인천시립박물관 우현마당에 전시된 학익고인돌Ⅱ

 

인천의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지석묘)은 현재 강화도와 서구 대곡동을 중심으로 250여 기 이상 분포하고 있다. 특히 강화도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인천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들 유적에서는 민무늬토기와 돌도끼, 돌화살촉, 반달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농경과 사냥 활동 등 청동기시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 문학산 일대에는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3기, 문학동에 1기 등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학익고인돌을 포함해 4기만 남아있다. 아쉽게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인돌은 한 기도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금의 학익동은 바다와 떨어져 있지만 청동기시대에는 바닷가에 접한 완만한 경사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학익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인천 내륙지역에 고인돌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가치가 있다.

 

인천의 고인돌 분포도(좌측 문학동, 주안동 가운데 대곡동, 원당 우측 위 강화도)
인천의 고인돌 분포도(좌측 문학동, 주안동 가운데 대곡동, 원당 우측 위 강화도) - 시립박물관 1층 전시장

 

고인돌의 쓸모는 무엇일까?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취재 간 날 칼바람 속에 박물관 나들이 온 아이와 엄마가 나누는 대화가 정겹다.

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 돌은 뭐 하는 데 쓰는 거야? 올라가서 앉아봐도 돼요?”

“하하하. 개구쟁이 울아들, 할아버지 산소 가봤지! 이건 그냥 돌이 아니란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그 할아버지보다도 더 오래된 할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셨던 산소 같은 거야. 올라가면 될까? 안 될까?”

“안 돼요! 근데 우리 할아버지 산소랑은 완전 다르네. 꼭 의자 같이 생겼어요. 올라가서 놀고 싶은 놀이터 같아요.(까르르~)"

아이는 아쉬움 반 신기함 반인 표정으로 즐겁게 웃으며 엄마 손을 잡고 폴짝거리며 걸어갔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처럼 남는 건 기록밖에 없다. 우리가 선조들이 살았던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말이다. 원래의 위치를 보존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학익고인돌은 복원할 수 없는 소중한 역사 문화유산으로 남아 인천의 청동기시대 역사의 맥을 잇고 있어 무척 다행이다. 무덤의 주인은 가고 없지만, 삶의 기록은 우리 곁에 남아 2023년 12월 오늘도 당당히 서서 자신의 쓸모를 다하고 있다.

출처; 인천광역시 시립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 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 네이버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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