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도배 나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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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도배 나서던 날
  • 박남수
  • 승인 2024.01.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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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나눔의 글마당]
박남수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글쓰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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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신문 <인천in>이 이달부터 인천노인종합문화화관과 함께 회원들의 글쓰기 작품(시, 수필, 칼럼)을 연재하는 <소통과 나눔의 글마당>을 신설합니다.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고, 글쓰기 훈련을 통해 갈고 닦은 시니어들의 작품들을 통해 세대간 소통하며 삶의 지혜를 나눕니다.

 

 

남편은 직장생활이 싫다고 했다. 입에 달고 있는 말이 ‘직장 그만두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머리 꼭대기까지 긴장감이 올라왔다. ‘안 되지. 아이들이 둘인데…’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 나는 다시 취직할 생각을 했다. 처녀 때 했던 간호사 일을 하려는데 임금 문제가 흡족하지 않았다.

석바위 여성복지관에 도배과가 있었다. 처음엔 선착순이었고 다음엔 제비뽑기였다. 이과 저과 사람들이 많이 몰리니 어떤 여자는 교란작전을 피우며 여러 사람을 줄에서 탈락시키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금냥 우물쭈물 서 있다 흰 구슬을 잡고 합격하였다.

사 개월간 결석 한번 않고 배워서 필기와 실기 모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사회에 나왔다. 둘이 짝지어 일을 해야 하는데 동료의 급한 사정으로 방 한 칸 도배가 들어왔다. 떨리는 맘으로 용감하게 가방을 챙겨 들고 간석 지업사로 향했다. 내게 배당된 곳은 신세계 아파트 다섯 평짜리 안방이었는데 그때 서서히 건설경기도 살아나고 있음으로 도배도 자연 많아진 시기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일꾼 하나를 사서 안방 짐을 빼놓고 거실에서 도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천정 길이는 십 센티 여유를 두고 더 길게, 벽 길이는 오 센티 여유 더 길게’ 속으로 되뇌이면서 재단하고 풀칠해서 우마 두 개를 펴고 올라섰다. 첫 장을 집어 우측에서 좌측으로 왼 손은 폭을 맞추고 오른손은 솔질을 하며 발은 게걸음으로 세 걸음 후 아래를 쳐다 보며 다음 우마로 건너가야 한다. 세 걸음 후 발을 쳐다보기는 것은 철칙이다. 우마 끝부분에 힘을 가하면 발판이 휙 넘어갔다. 이 일에서 손을 뗄 때까지 지켜온 일이다.

그런데 둘째 장이 문제였다. 삼분지 일 정도는 포개는 정도가 맞다가 갈수록 점점 벌어지다 끝에 가면 십 쎈티쯤 벌어졌다. 다시 떼어서 처음부터 밀고 갔다. 여전히 여전히 안 된다. ‘학원에서 실습할 땐 이게 아니었는데’ 하면서 떼었다, 붙였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긴장도가 높아지면서 열은 확확 오르고 심장은 콩닥콩닥 뛰었다. 주인과 사람들은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도배는 순식간에 하는 거라던데.” “금방 끝난다고 했는데” 하고 두런거렸다. 나는 방문을 콩! 닫아 버리고 고민했다. 도망갈까? 그러면 안 되겠지!

점심 때가 되니 밥을 시켜왔다. 애를 써서 그런지 시장기가 느껴져 수북한 잡채밥 한 그릇만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웠다.

그렇게 다섯 시간 여에 내 맘에도 들지 않게 일이 끝났고 “그만 가세요” 탐탁지 않은 듯한 주인의 말에 꽁지가 빠지게 지업사로 돌아왔다. “다음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사장의 말에 “네” 힘없이 나는 대꾸했다.

그 때 내 얼굴이 우연히 거울에 비쳤는데 ‘앗! 이게 누구야!’ 새빨간 얼굴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방 한 칸 인건비가 그 당시 칠천원이었는데 만원 지폐 한 장을 받았다.

이십여 분 집에 걸어오는 동안 주머니 안에 든 만원을 엄지 검지 두 손가락으로 계속 비벼대고 있었다. ‘이 일은 못 할 일이야.’ ‘안 할 거야.’ 또 생각 없이 거울을 들여다 봤다. 앗! 이번에는 새빨간 여자 얼굴 하나에 코만 하얗게 서 있는 창백한 인물 하나가 비쳤다. 손으로 쓱쓱 비비니 깔깔했다. 걷는 동안 바람이 온도를 내려서 고운 흰 소금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분을 만나면 점심 한 끼 융숭히 대접하고픈 마음이 든다. 무참한 첫 경험이었지만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기에 ‘한다 안 한다’ 말로만 그랬지 당장 그만 두지는 않았다. 한두 번 다니다 보니 서서히 재미가 붙었다.

부평 삼거리에서 간석 사거리로 넘어가는 길에 부평농장이 있다. 내가 일하던 동네였는데 그 즈음에는 음성 나 환자 촌이었다. 정부에서 그 곳에 사는 분들에게 생계 대책으로 양계를 하면서 살라고 준 지역이다.

일을 하러 갔는데 주로 방 한 칸짜리였다. 초보자로 불안감이 몰려와 처음에는 데려다 준 총각을 따라 나가려 했다. 숨도 안 쉬고 퐁당퐁당 얼마나 뛰어다니며 일을 했는지 한 시간여에 다 마친 느낌이었다. 어떤 행상 아주머니는 물건을 팔려고 와서 물 한 그릇을 청해 마시다가 그분들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여 이고 온 물건을 팽개치고 달아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병을 갖고 있는 그분들은 마음이 퍽이나 순수하고 따뜻했다.

나의 일이 차차 익숙해지고 부평 농장도 친숙해질 때 쯤 검정 구두를 신고 검정 슈트를 입은 어떤 남자들이 검은 세단차에서 내렸다. 늘씬한 몸매로 서 있던 그 분들이 그 곳에 공장을 짓기로 하였단다. 그 후 내가 도배를 해 드렸던 그 마을 주민들은 거의 아파트로 이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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