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6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인천 花街洞(화가동) 애사(哀史) 인천 花街洞(화가동) 애사(哀史) 해방 전 인천에 화가동이라 불리는 유곽이 있었다. 그 원류는 일본의 공창제도를 본딴 것이다. 10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고급 유곽에는 花魁(오이랑)이라고 칭하는 '언니뻘 창녀'들이 있었다. 미녀에다 하려한 몸치장, 거기에다 예절교육까지 받고 기예에도 능했다. 예기(藝妓)와 창녀를 겸직을 한 셈이다. 이런 고급유곽에는 돈많은 한량들이 단골 고객이었고, 서민층은 단순한 성매매를 위해 유곽을 찾았다.조선인 유곽은 성매매를 위한 유곽일 뿐이다. 당시 기생들은 용동의 기생조합인 老妓(노기)가 경영하는 건반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다. 요리집에서 기획연재 | 김석배 객원기자 | 2011-09-06 12:10 골목골목 헌 고무신 모으던 엿장수 골목골목 헌 고무신 모으던 엿장수 내 4촌형 장인인 안기영씨는 1920년 어느 날 상인천역(지금의 동인천역) 광장에 서성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일본인 신사가 다가와 “일본 고급여관을 찾는데, 어디로 가면 되는가요"라고 말을 건네왔다.평소 착하고 친절한 안씨는 "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일본 여관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일본인이 고마워하며 "친절히 안내해 주셨으니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합시다"라고 말했다. 안씨는 여관 안으로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차를 마시며 안씨의 친절한 마음씨에 반한 일본인은 "사실은 나는 조선인이 신다 기획연재 | 김석배 객원기자 | 2011-08-09 15:26 한여름 보양식, '인천 鰍湯(추탕)' 한여름 보양식, '인천 鰍湯(추탕)' 용동 마루터기(현 애관극장 뒤쪽)에 당시 '영화양조장' 사장의 모친(필자의 사촌누님의 시어머니)이 양조장 옆에서 직접 경영하던 鰍魚湯(추어탕)집이 있었다. 해방 전까지 인천에선 유일한 추어탕집이었다. 양조장 사장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추어탕집이니 손님들의 신뢰도 있었다. 여름내 논두렁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로 끓여내면 당시 한여름 보양식으론 제격이었다. 고기보다 영양이 많고, 미꾸라지를 뼈째 끓이기 때문에 칼슘도 풍부하다. 지금 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개고기를 파는 식당은 없던 시절이다. 세간에 유명했던 이 추어탕은 실은 기획연재 | 김석배 객원기자 | 2011-07-27 11:00 해방 전까지 인천 차이나타운 여인들은 '전족' 해방 전까지 인천 차이나타운 여인들은 '전족' 해방 전 인천 차이나타운이나 서울 북창동 등지에 모여 살던 중국 여인들은 모두 전족(纏足)을 하였다. 차이나타운 골목길을 이들 여인이 '띠뚝 때뚝' 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전족은 옛날부터 중국에서 漢族(한족)이 여식을 낳으면 어릴 적에 천으로 발가락을 안으로 꺾고 묵어 매 발을 작게 보이게 하는 풍습이다. 중국 南北朝(남북조) 무렵부터 행해져 내려온 풍습으로, 2차 세계대전 후 근대에 와서 폐지되었다. 일설에는 여인들이 나돌아다니는 걸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 풍습을 강요하였다고 한다. 중국은 황족이나 귀족 또는 기획연재 | 김석배 객원기자 | 2011-07-15 11:11 1938년 서울서 인천 냉면을 시켜다 먹었다? 1938년 서울서 인천 냉면을 시켜다 먹었다? - 1938년 서울서 인천 냉면을 시켜다 먹은 이야기(실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14살 때인 1938년 실제 눈으로 보고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분이 조선일보에 자전거로 냉면을 배달했다는 기사를 올린 걸 보았습니다만, 필자는 실제로 본 경험과 냉면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방학 때면 을지로 입구 서울 삼촌댁에 가서 1주일을 사촌들과 함께 지내곤 했습니다. 서울 롯데백화점 자리가 당시 삼촌 땅이었으며, 여러 채 건물과 창고를 갖고 있었고 일본인에게도 세를 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서울 유지인 화신백화점 박 기획연재 | 김석배 | 2011-06-25 15:26 64년 전 6월22일 서윤복 선수 인천서 카퍼레이드 64년 전 6월22일 서윤복 선수 인천서 카퍼레이드 64년전인 1947년 6월22일은 보스톤마라톤 우승자 서윤복 선수가 인천에서 카파레이드를 벌인 날이다. 1945년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던 나라의 청년 서윤복은 제51회 보스턴 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25분3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월계관을 썼다. 서윤복의 우승은 당시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미군정 하에 있던 때 전 국민에게 기쁨과 용기, 환희를 안긴 쾌거였다. 세계는 보스톤 마라톤대회 반세기 사상 첫 동양인 우승에 경악했다. 그러나 영광의 뒤안길에는 눈물 젖은 빵과 약소국의 설움이 배어 있었다. 가난했던 기획연재 | 김석배 | 2011-06-23 12:37 처음처음1끝끝